이별이 있으면 또 새로운 만남도
온전히 홀로 보내게 될 페티예의 하루가 밝았다.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를 거쳐 페티예에 도착하기까지 제대로 휴식도 못한 채 낮, 밤 없이 움직인 데다 이런저런 감정 소비까지 겹쳐 매우 피곤했었던 터라 푹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다만 앞으로의 계획이 없다는 건 새로운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어떤 행선지를 정해둔 건 아니지만 애초에 페티예는 A가 오고 싶어 했던 만큼 그의 정보만 믿고 넘어온 곳이라 개인적으론 크게 관심이 없는 곳이기도 했고, 이곳에 대해 유일하게 아는 거라곤 패러글라이딩으로 매우 유명한 장소이기에 그 체험을 하기 위해 꼭 방문하고 싶다는 얘기를 여행도중 그를 통해 몇 번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액티비티에 그리 관심 있는 편이 아닌 나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혼자 그 경험을 해야 할까 싶어서 오늘 하루동안 고민 해보기로 했고, 이 외에 유명한 선상 보트 파티도 있다길래 이건 혼자서라도 갈까 싶어 투어의 후기를 찾아보니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혼자 가면 약간 민망할 수 있다더라. 나는 낯가리지 않는 성격이 맞긴 하지만 결국 보트 파티도 포기했는데, 민망할 것 같다는 이유보다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떠들썩하게 놀기보단 좀 더 조용히 쉬고 싶은 마음이 컸을 뿐이다. 물론 이 도시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떠나는 날엔 그냥 가볼걸 하고 후회했지만.
오전 10시 정도까지 숙소에서 뒹굴거리다 식사도 해결하고 가볍게 동네 산책도 할 겸 외출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어젯밤 이 도시에 도착하며 느낀 습도와 온도로 인해 낮에는 꽤 더울 거라 예상하고 나름 일찍 나왔음에도 내 생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뜨거운 열기였다. 날씨 앱을 확인했을 땐 이미 34도 정도에 엄청난 습도가 체감온도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별을 겪은 기간도 아주 무더운 7월의 여름이었으며, 지난 몇 년간을 프랑스에서 지내다 오랜만에 겪어보는 한국의 덥고 습한 날씨에 쉽게 지치곤 했다. 물론 그런 날씨에도 내 연인은 이곳저곳 외부 데이트를 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더위를 이유삼아 그녀의 제안을 대부분 거절했다. 물론 늘 생각은 있었다. 지금은 너무 더우니까 좀 더 시원하면 많이 놀러 다녀야지. 여행도 가고, 같이 쇼핑도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가야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더위 때문에 그녀와의 시간을 줄인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함에 소중함을 잃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굳이 그 더운 날에 데이트를 하고 싶기보다는, 내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겠지..
더위가 꺾여 거닐기 좋은 계절이 왔어도 내게는 그녀에게 시간을 온전히 쓰지 못하는 분명 또 다른 이유와 명분이 생겼을 것이다. 그때의 내가 보기엔 더없이 합리적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은 수많은 변명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내 일기장에 이런 내용을 적은 적이 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변명이었다곤 하나, 어쨌든 당시엔 가을이 다가오면 같이 하고 싶은 나름의 계획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결국은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혼자서 마주하게 될 가을. 선선한 바람을 혼자 맞는 게 영 서글퍼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버리자고. 쓸쓸한 가을이 될 바엔 아예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가버리자고.
그래서 대체 이 얘기를 왜 꺼냈냐면, 혼자 보낼 가을이 퍽 외롭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가을을 완전히 없애 달라는 말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한국이었다면 이제 막 시원해지는 날씨를 마주했을 9월 말이었음에도 조지아의 카즈베기에서는 벌써부터 냉랭한 영하의 겨울 날씨를 겪고 온 데다, 튀르키예의 페티예에서는 무덥고 습한 여름 날씨를 그대로 다시 겪고 있지 않나. 가을이 오는 게 쓸쓸하다고 했지, 완전히 뛰어 넘겨버리고 싶다고 하진 않았어. 내 가을을 돌려줘.
더위를 뚫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점심을 해결할 식당을 찾아다니던 도중 문득 생각난 것. 조지아의 해안도시였던 바투미에서도 그렇고 페티예에서도 내가 찾아다니는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오징어 튀김(깔라마리 프리또)이다. 이런 날씨엔 남유럽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깔라마리 프리또에 레몬즙을 짠 뒤 소스를 찍어 맥주와 마시면 그만한 행복이 없는데, 아쉽게도 조지아를 비롯해 이곳에서도 그 간단한 음식을 찾는 건 실패했다. 아마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결국 튀르키예 어디에나 있는 케밥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마치고,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한 뒤 해변가 주위를 따라 산책하며 오랜만에 다시 혼자가 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더 이상 A가 없다는 사실이 약간 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는 것 자체에 외로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알게 모르게 그와의 동행을 겪으며 내가 받아들여야 할 이별에도 많이 의연해진 것일 테다.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카파도키아에서 심술궂은 말을 하지 않았으면 A와 틀어지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었을까? 계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까? 아니면 내가 어떤 제스처를 취했든 간에, 우리의 동행은 여기서 마무리되었을까?
전 날 느꼈듯 우리의 동행이 중단된 모습이 한국에서 겪은 연인의 이별과 겹쳐 보여 슬픔이 남아있었지만, 이 여행에서 있던 모든 해프닝을 좋게 보기로 했다. 나는 더디지만 차근차근 이별을 극복 중이고, A와 함께했던 고작 보름정도의 기간에 또 한 번 관계의 시작과 익숙함, 그리고 이별을 겪음으로써 다시금 나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연인에게 했던 실수, A에게 했던 실수, 이 모든 건 다음에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다만 연인이었든, 누구였든 간에 분명히 내가 어쩔 수 없는 성격 및 성향 차이의 영역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인 것이다. 오히려 2주의 길지 않은 동행을 통해 내게 이런 깨달음을 다시금 알려준 A를 좋은 추억으로 남기기로 했다.
생각이 과해질 때쯤 혼자만의 세계에 더 깊이 빠지는 걸 방지해 준건 이 도시의 날씨였다. 온도가 너무 높아 식혀야 한다는 경고 메시지가 뜨며 꺼져버린 내 아이폰 덕분에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 한낮의 산책을 중단하고 숙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더위였다.
숙소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며 더위가 한풀 꺾일 때쯤 다시 바닷가 근처로 가 맥주 한 잔 하러 나갔는데 근처에 있던 새로운 한국 여행자 B를 우연히 마주했다. 심지어 그는 나와 구면으로, A가 컨디션이 안 좋았던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 함께 투어 했던 인원중 하나였다. 그때는 하루 보고 말 사람이라고 생각한 데다 나와 A가 서로를 신경 쓰느라 남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에 당시 대화 한번 섞진 않았으나 얼굴은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다. 물론 튀르키예의 관광도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마주한 여행자 B를 보니 괜히 반갑기도 했고, 함께 식사를 동행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B는 나랑 A가 처음부터 여행을 같이 한 사이인 줄 알았는지 마침 그의 행방을 묻더라. 뭐 나한테는 처음부터 같이 다닌 사이가 맞기도 하고, 내가 가졌던 해프닝과 여행을 말로 꺼내면서 스스로의 생각도 정리할 겸 우리 동행의 시작과 끝을 B에게 간단히 풀어주었다. 나도 이런저런 곳을 많이 여행을 하며 여러 동행을 만나보긴 했지만 보통은 하루에서 이틀 정도였을 뿐, 단 둘이 이렇게 여행을 길게 하는 건 처음 있던 일인 만큼 얘기하면서도 돌아보면 참 신기한 인연이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여행자 B와 서로를 알아가며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 그도 패러글라이딩을 고민하고 있길래 여기까지 와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함께 해버리자 싶어서 다음날 새벽에 하러 가기로 예약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안 했을 것 같지만 우리 둘 모두 동조할 사람이 생겨서 오히려 추진력을 얻게 되기도 했고, 또 막상 정해지니까 새로운 경험을 맞이한다는 생각에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적당한 시간에 자리를 마치고 일어나 B와는 내일 새벽 패러글라이딩을 위한 만남을 약속한 뒤 숙소에 도착해서는 씻고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적었다.
돌아보면, 오늘 난 이 도시에서 관광객다운 컨텐츠는 하나도 즐기지 않았을뿐더러 해변을 따라 거닐고 다닌 것을 제외하곤 크게 기억나는 행동조차 한 게 없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혼자 보낸 시간에 많은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더욱 양분이 된 듯한 이 하루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A와 동행했던 시간이 결코 헛되진 않았었지만, 오히려 이쯤 헤어진 게 내게 있어서도 더 좋은 선택이 된 것 같았다.
처음부터 혼자 다녔다면 그저 혼자인 나에 계속 적응했을 테지만, 둘이 다니다가 혼자가 된 이 상황은 아무래도 외로움이 없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보냈던 보름동안의 시간은 정말로 내게 좋은 것들만 가져다주었기에 두고두고 기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했으며, 동시에 내 남은 여행도 계속 잘 해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미묘한 긍정감과 자신감이 들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작디작은, 하지만 크다면 아주 큰 사건이 생겼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다 보니 이불에 웬 좁쌀만 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게 보이길래 밖에서 들어왔나 보다 싶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손톱만 한 베드버그를 마주했다. 유럽에 몇 년이나 살면서도 늘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었던 이 벌레의 실물을 드디어 영접한 것이다. 미쳤다 싶었다. 참고로 이 날 이후로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한국까지 세계 곳곳에서 베드버그가 급증한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혹시나 싶어서 방을 더 뒤져봤는데 그 후로 3마리 정도가 더 나와서 바로 내 옷 정리하고 침대 소독했다. 급하게 잡은 숙소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으며 퀄리티도 별로긴 했지만 내가 원한 건 단순히 잠만 편히 잘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여행에 대한 각오가 차오르자마자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나 싶었지만, 머리 굴려봤자 생각도 안 나오고 숙소 옮기기엔 이미 밤이 너무 늦어 피곤하고 그냥 물려면 물라지 싶어서 그대로 누웠다. 어쩌겠어? 경험으로 생각해야겠지 뭐.
그래도 호텔 평점은 꼭 제일 낮게 매겨야겠다고 다짐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