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동행은 여기까지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이자 야간 버스를 타고 파묵칼레가 위치한 데니즐리로 이동하는 날.
오늘도 역시 새벽 일찍 일어나 열기구가 날아오르는 풍경을 보러 가장 유명한 일출 스팟을 방문했는데, 이른 시간인데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게 어제 갔던 장소와는 확연히 다르더라. 카파도키아는 여러 관광자원이 있지만 어떤 것도 열기구가 보이는 이 풍경을 이길 순 없다고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새벽에는 일출을 구경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많더니, 해가 다 떠오른 이후엔 그 넓은 장소에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나와 A 둘만 있었다. 이 장소는 단순히 일출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마을의 풍경을 모두 바라보기에도 적합한 만큼 우리는 바로 내려가는 대신 그곳에서 각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나는 생각을 비운채 도심 쪽을 바라보며 한 시간 정도 명상을 했다. 아직은 뜨겁지 않은 아침 햇살이 나를 감싸고돌며 어제 막 빨래를 마친 뽀송뽀송한 옷에 깃드는 따끈한 볕냄새와 풀벌레 소리, 작게 보이는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오감으로 느끼며 생각을 비우고 온전히 나만의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좋은 시간이었어.
다만 일출 보고 온 후 다음 일정 준비를 하는데 A의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진 게 느껴졌고,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던 것 같은데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길래 결국 하루 내내 같이 있으면서도 따로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인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나대로 걱정돼서 마음이 불편했으며, A도 A대로 본인의 컨디션으로 인해 내 여행에도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불편했던 건지 여행이 헛돌더라.
결국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정신없이 마무리된 채로 데니즐리에 가는 야간버스를 탑승했다. 파묵칼레로 이동하는 길 내내 걱정이 앞섰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 5시쯤 데니즐리 터미널에 도착. 우리는 파묵칼레를 짧게 관광한 후, 당일 저녁에 바다 도시인 페티예로 이동하는 만큼 시간에 맞춰 데니즐리 터미널로 다시 돌아와야 했는데 여기서 A와의 작은 의견 충돌이 생겼다.
"담아, 어차피 우리는 파묵칼레 관광한 후 오후에 터미널로 돌아와야 하니까 여기서 짐을 맡길 수 있는지 먼저 찾아봐요."
"짐을 맡기는 것보단 먼저 파묵칼레로 이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은 데다, 마침 지금 파묵칼레행 돌무쉬가 있으니까 바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곳도 큰 관광지인만큼 우리의 짐을 맡아줄 곳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이렇게 아직 서로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는데, 돌무쉬 기사는 다음 차량이 한 시간 뒤에 있으니 파묵칼레에 가려면 얼른 타라고 재촉하며 소리 지르고 있기에 결국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먼저 이동했다. 게다가 도착하고 난 뒤에도 투어사와 파묵칼레 입장비용을 포함한 픽업비용 등을 조율해야 해서 정신없이 바빴는데, 이 과정에서 A의 컨디션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좋지 않아 보이길래 쉬고 있으라 한 뒤 내가 설명을 듣고 계획을 짜기로 했다. 다행이라면 나를 상담해 주는 직원이 캐나다에서 오래 거주해서 프랑스어를 할 줄 알더라.
어느 정도 상담과 흥정을 마치고 난 뒤 A에게 우리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됐으며 어떤 식으로 오늘 일정이 흘러갈지 설명해주려 했는데, 갑자기 A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리 여행 일정이 너무 피곤한데요, 지금 우리가 무슨 도장 깨기 하는 것도 아니고.."
"..."
나는 이 말에 약간 상처받았다. 처음 이스탄불에서 동행으로 만나 이동했던 트빌리시와 카즈베기, 바투미, 카파도키아, 그리고 오늘 도착한 파묵칼레까지. 어떤 날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나의 개인비용을 더 써야 할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음에도 장기여행 중인 그의 상황을 존중해 값싼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시간과 체력이 더 소비될 때도 있었다. 사실 나 혼자 다니면 조금 더 여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내가 이 모든 길을 선택한 건 효율을 따지는 것 보다도 그저 A와 함께 하는 경험들이 즐거워서 하고 있는 건데, 그 모든 걸 손바닥 뒤집듯 하는 얘기 같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파묵칼레에 입장했지만, A도 묘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데다 나 역시 계속 마음이 좋지 않았던 만큼 이렇게 가다간 이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서로가 오해가 있다면 풀기를 바라며 먼저 말을 꺼냈다.
"A, 지금까지 우리의 여행에선 계획대로 된 적은 많이 없지만 그럼에도 같이 다니는 이 길이 참 즐거웠어요. 근데 도장 깨기를 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와는 달리 A는 이 여행에 피로감만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막막한 상황에서도 이 여행이 서로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길 바라서 했던 우리의 노력들이 A에게는 의미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네요. 내가 그렇게 말한 건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정말 미안해요.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로 움직이다 보니 피곤하기도 했고, 카파도키아서부터 이곳을 거쳐 페티예로 이동하기까지 제한된 시간 안에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그 외에도 오늘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있던 의견 마찰이라거나 서로가 여행에서 맡고 있는 역할, 갖고 있는 생각까지 짧게나마 대화를 하며 오해를 풀었고, 일단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응어리는 풀어진 채 당장은 이곳을 즐기기로 했다. 다만 내 생각대로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지기보다는, 이후에도 묘하게 서로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관광지 파묵칼레. 이곳은 그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웠으며 관광객도 북적였다. 다만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일까, 현실은 그보다는 덜했다. 기대한 만큼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던 데다 석회 바닥을 걷는 발바닥은 너무 아팠고, 뜨거운 날씨로 인해 금방 지치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 여행에서 오는 즐거움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 여행에서 오는 즐거움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점점 더 타오르는 날씨에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서로가 정산해야 할 비용을 계산하던 도중, 내가 투어 비용을 너무 비싸게 주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파묵칼레 근처에 투어사들 중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있다는 건 들었지만 나는 나대로 잘 알아보고 결제한다는 게 평균보다 훨씬 비싸게 계산했던 것이다. A는 그걸로 내게 짜증을 냈고, 물론 내 실수인 건 맞으나 결국 나도 짜증이 나버렸다.
'내가 실수한 건 맞지만, 비용적인 측면만 따지면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내가 지불한 게 훨씬 많은데 이렇게까지 짜증을 낸다고? 심지어 투어비용 계산 할 때는 몇 번이나 그에게 확인시켜 줬는데도?'
나중 알고 보니, 나는 바가지를 당했던 게 아니었다. 여행을 지속하며 튀르키예를 떠나고 한참 후에나 알게 된 사실인데 파묵칼레에서의 정산은 나와 A 모두가 잘못 계산한 거였더라. 나와 A 이후 파묵칼레를 다녀온 누군가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우리가 파묵칼레를 방문했을 때 기준으로 불과 몇 주 전에 가격 인상이 있었다는 걸 그 사람을 통해 들었다. 나와 A는 이 사실을 아예 몰랐던 데다, 당시 나의 단순한 계산 실수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채 다시 정산해 보니 우리는 오히려 대단히 합리적인 가격에 투어를 이용했던 것이었다. 물론 이 오해가 없었더라도 A와 내가 무사히 여행을 마쳤을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어쨌든 저 사실을 깨달은 건 먼 훗날이고, 당장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던 만큼 감정의 골의 깊어진 채 다른 관광지를 둘러보는데 그동안 우린 거의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이전에 서로 재밌게 사진 찍어주고 하던 과정도 나는 귀찮아졌고, A는 짜증을 냈다. 그렇게 한참을 불편하게 다니다 보니 든 생각. 이쯤에서 동행을 그만두는 게 맞는 것 같다.
파묵칼레 관광이 끝난 후, A가 먼저 내게 동행을 그만두자고 말했다.
우리는 페티예를 거친 뒤, 이스탄불로 다시 이동하여 이스라엘에 입국할 예정이었다. 나도 동행을 그만두자고 얘기해야겠다 싶긴 했으나 일단 튀르키예의 일정이 마무리된 후 말하려 했는데, 그는 페티예에 도착한 뒤부터 바로 각자의 여행을 하자고 하더라. 갑작스러운 제안이 처음엔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내 이해했다. 이 여행은 더 이상 우리가 얻어가는 윈윈도 없었고, 궁극적인 목표였던 즐거움도 사라졌다. 서로의 눈치 보는 여행이 되어버린 지금, 굳이 더 동행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다.
페티예로 이동하는 버스를 타고 있는 4시간 동안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의연히 받아들였던 처음과는 달리 이동하는 동안 조금은 심란했다.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날부터 정신없이 이동하느라 제대로 된 대화 할 시간도 없었는데 이대로 헤어져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결국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터미널에 도착 후, 서로 엮여있는 짐을 정리한 뒤 인사를 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의 일정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얘기와 함께 마무리를 지었다.
우리가 이스탄불에서 만났을 때 얘기했던 것처럼 동행이 끝나는 것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늘 혼자가 될 각오는 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 여행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떠나온 것이기도 하고, 이번 여행에서 늘 배우고 있듯 세상이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는 않으니까. 다만 이런 식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는 건 아무래도 아쉬웠다. 적어도 마지막은 서로가 계획했던 동행을 모두 마치고 난 뒤 앞으로 있을 각자의 길을 응원하며 끝나길 바랐는데.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는 여행길에서 만난 사이니까, 여행이 맞지 않으면 헤어져야지.
이 도시는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습도가 높다는 게 확 체감됐다. 원래 A와 같이 잡으려던 숙소를 뒤로한 채 새로운 숙소 쪽으로 혼자 이동하는데, 아무래도 급하게 잡은 곳이라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길을 걸어가는데 랜덤으로 재생되는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알레프의 '창문'이라는 곡이 나왔다. 내가 A한테 추천해 준 몇 개의 곡 중 그가 제일 마음에 들어 했던 노래였다.
결국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마음의 앙금이 남은 채 헤어진 A. 그가 밉거나 싫진 않았다. 오히려 고맙고 미안하지. 비록 서로가 엇나가 계획한 일정까지 같이 하진 못했지만 여행 내내 심적으로 큰 의지도 되어준 데다, 함께 있으며 많은 걸 배우기도 했고, 2주 넘게 멋진 추억을 선물해 준 것에 대해.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잘 지내고 싶던 연인과 관계의 상실을 겪고 나온 여행인데, 그 깊이는 다르지만 정해진 기간 동안 잘 지내보려고 한 사람과 또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됐구나.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엔 조금 눈물 났다.
내일부터, 아니 오늘 밤부터는 완전히 혼자네. 잘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