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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아 Feb 23. 2024

부다페스트, 어두울수록 빛나는 곳

푹 쉬자. 아주 느긋하고 여유롭게

전날 밤 갑작스레 결정한 새로운 여행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이동하는 날이 밝았다.


여행을 시작할 때의 예정대로였다면 튀르키예는 3~4일 정도만 둘러보고 떠날 계획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일정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 드디어 3주 만에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네.


그래도 한두 번 다녀와봤다고 익숙해진 탁심 공항버스 정류장.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은 다시 이스탄불의 이 모습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기에 풍경을 눈에 많이 담아두었다. 마무리가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머무는 동안 너무 즐거웠어. 나한테 참 멋진 나라로 기억될 것이고, 분명 언젠가 또 찾아올게!


약간은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탑승한 부다페스트행 비행기. 운이 좋게 비상구 자리를 배정받아서 다리를 쭉 뻗고 갈 수 있었다. 사실 이번만큼은 창가 쪽에 앉아서 이 도시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내 자리는 편한 대신 창문이 아예 없다 보니 조금 아쉬운 맘은 있었다. 이륙할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뒤쪽에 있는 창문으로 흘끗 보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한 이스탄불의 젖어있는 배경 역시 꽤나 좋다고 생각하며 내 여행의 시작을 따듯하게 품어준 튀르키예도 정말로 마무리.  




이스탄불에서 부다페스트는 2시간이면 도착하는데, 시차까지 조정되어 약 1시간 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름 운이 좋았던 건지 별로 급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음에도 입국 수속도 빨리 마치고, 수하물로 붙였던 내 짐도 빨리 나왔으며, 공항버스도 내가 타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얼떨결에 금방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본 풍경은 약간은 익숙한 유럽의 느낌과 더불어 한적함 그 자체로서, 튀르키예도 아주 좋은 곳이었지만 그 특유의 어수선함을 이제는 좀 벗어나고 싶다고 느끼던 차였기에 더 만족스럽더라. 물론 난 어디에서든 동양 외국인인 건 똑같지만, 그래도 프랑스에 짧지 않게 살아서 그런지 이곳에서 받는 느낌이 훨씬 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내로 들어오는 공항버스는 두 종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버스를 탑승했던 내겐 그런 사실이 문제 될 리 없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알아본 것도 하나 없이 흘러가는 대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적당히 이쯤이면 좋겠다 싶은 곳에 내려 전철로 갈아타니 어느샌가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길 모르는 채로 조금 느리게 가면 어때? 이러고 돌아다니기 위해서 여행 짐도 최소한 간소화하고 온 데다, 어쨌든 숙소는 무사히 도착했고, 무엇보다 나는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며 이곳을 방문한 거니깐.




숙소는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반대편 강가에서 5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전철역에서 나오자마자 부다페스트를 관광지로서 먹여 살리는 그 풍경을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하이라이트는 해가 지고 난 뒤지만 앞으로 일주일간 지겹도록 마주할 장면이라 하니 약간은 웃음이 나더라.


도착한 숙소는 넓고 깨끗한 데다, 앞으로 일주일 살 공간이라고 생각했을 때 대단히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아무래도 최근의 숙소에서 벌레와 청결에 당하고 온 게 많아서 그런지 내 허들이 더 낮아졌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숙소는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전 날 급하게 잡은 숙소치곤 매우 만족스러웠다!


짐만 간단하게 푼 뒤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는, 그렇지만 아주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힘들게 여행하러 올 거였으면 유일하게 아는 정보라곤 야경밖에 없는 부다페스트에만 일주일 있겠다는 선택조차 했을 리가 없지. 그렇게 한두 시간 정도 빈둥거리다, 적당히 씻고 외출해서 리들이라는 마트를 다녀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리들은 언제나 내 편이다. 유럽 어느 도시를 가도 자주 보이는 데다 어떤 식재료를 팔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만큼 개인적인 접근성이 좋은 곳이라서, 마치 프랑스에 혼자 살며 일주일치 장 본 것처럼 별 다를 것 없는 재료들을 구매했다. 기나긴 프랑스 생활 때 그랬던 것처럼 파스타를 자주 요리 해 먹을 생각에 약간은 유학생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된 게 물을 안 팔지? 몇 번을 돌아봤는데도 스파클링만 팔고 일반 물은 못 찾겠더라. 물론 정말로 안 팔리는 없겠지만, 진짜 어디에 있던 걸까.




오늘의 이 여행기는 부다페스트의 가장 유명한 야경 스팟인 어부의 요새에서 쓰였다. 이것이 내 유일한 오늘의 계획이었는데, 바로 노트북만 챙긴 채 이 멋진 풍경을 마주 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글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비록 어부의 요새가 내가 생각했던 만큼 뻥 뚫린 곳에서 야경을 보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세상이 늘 내 마음대로 되겠어. 오늘이 조금 아쉬웠다면 내일은 어부의 요새가 아닌 도나우 강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면 되는 거고, 돌아다니다 보면 또 마음에 드는 장소를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지.


모두가 부다페스트에서 좋아하는 그 풍경


아직 마무리해야 할 하루의 일과가 한참 남아있긴 하지만, 이 풍경을 바라보며 드는 마음을 적어 보았다. 적당한 바람이 있으면서도 따듯한 날씨와, 부다페스트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 그리고 떠오르는 보름달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분위기이다. 노래도 가장 잔잔하면서 좋아하는 곳들만 나오도록 해둔 데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당연히 방해할 사람도 없는 곳.


여행 다니며 시간 날 때 명상을 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혼자 온 이곳은 내 사진을 찍어주거나 대화를 나눌 사람은 따로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남기지 못한 사진 대신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이 풍경은 나중에 그림으로라도 남기면 되니까. 누군가와 나누고 싶던 대화는 일기에 적어 미래의 나에게 이 순간을 남겨주면 되니까.


이곳을 일주일 동안 바라보며 내 마음을 달래다 보면 나는 아직 남은 이별의 여운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까, 더 나은사람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모든 것에 강박을 가지지는 않기로 하자. 설령 이 시간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란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부의 요새 기둥 한편에 앉아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한 해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어둠이 깔렸다.


이 풍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듯했다


파리에 거주할 때 몽마르트 근처에 살았던 나는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는 야경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비슷한 느낌의 어부의 요새는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게다가 이것이 내가 부다페스트를 찾아온 유일한 이유긴 하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바로 앞에 위치한 조명이 너무나 강해서 결국 오래 머물진 못한 채 적당히 구경하다 어부의 요새를 내려왔다.


더운 곳도, 추운 곳도 이미 경험하고 난 뒤 부다페스트에서 처음 맞이하고 있는 올해의 가을. 선선한 날씨와 약간은 쌀쌀해진 바람은 시간이 확실히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더라. 외로움이 느껴질까 봐 그렇게 마주하기 싫었던 혼자 겪는 가을은 더 이상 내게 피하고 싶은 계절이 아니었다. 그저 여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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