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주인공이 내 마음을 건드린 순간
주말 아침,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
다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다연아, 뭐 해? 자지? 영화 보러 가자!”
수화기 너머 인아의 밝은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응… 잤어…” 다연은 잠결에 대꾸했다.
“12시 영화야. 일본 애니메이션인데 요즘 인기 장난 아니야. 너네 집 앞 영화관. 씻고 나와!”
다연에게 묻지도 않고 이미 계획을 다 짜놓은 인아였다.
‘인아답다.’ 다연은 피식 웃으며 이불을 걷어찼다.
“알았어. 바로 준비할게.”
영화관 입구에 다연이 도착했을 때, 인아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연예인처럼 눈에 띄는 인아는 오늘도 밝고 당당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괜히 다연은 쑥스러워 고개를 살짝 숙였다.
“팝콘은 캐러멜이지? 콜라는 당연하고~”
인아는 이미 포스기 앞에서 주문을 누르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팝콘 반이 사라졌고, 인아는 신나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사실 다연의 취향이 아니었다.
슬그머니 졸다가, 어느 순간 스크린에 눈길이 고정됐다.
주인공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었다.
상처, 분노,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쌓여 괴물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저건 내 이야기야.’
다연은 숨을 멈췄다.
가슴 깊은 곳이 ‘팍’ 하고 울렸다.
용서하지 못해 마음속에 괴물이 자란 건,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천천히, 그러나 멈출 수 없이 흘러내렸다.
‘하나님, 전 어떻게 해야 가족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왜 저만 해야 하는 걸까요? 전 아직도 아픈데…’
속으로 외치며 다연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조용히 울고 있었다.
“야, 울어? 애니메이션 보면서?”
인아가 팔을 툭 치며 놀렸다.
다연은 쑥스러운 듯 눈가를 훔치며 짧게 대답했다.
“슬프네…”
인아는 놀리지 않고 잠시 다연을 조용히 바라봤다.
영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는 바쁘게 오가는 차들과 가로수가 보였고, 잔잔한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 향이 둘 사이의 공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괴물이 된 주인공이… 내 모습 같았어.”
다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이나 영화 주인공 모습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어.”
인아는 커피 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다연아, 우리 모두 과거가 있잖아. 어릴 때 생긴 상처는 오래 남는대. 요즘은 상담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사람들도 많다더라.”
“내 얘기를 모르는 사람한테 말하기 싫은데… 창피하잖아.”
다연은 스푼을 쟁반에 ‘툭’ 하고 던졌다.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이다연이라고 말하고 싶겠어?”
감정이 살짝 터져 나왔다.
인아는 놀라지 않고 다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차라리 나… 다시 교회를 가볼까 봐.”
다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좋아. 우리 교회 같이 가자. 지금 바로 가도 돼.”
인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역시 성격 급한 인아였다.
어릴 적 다연은 동네의 작은 교회에 자주 숨어 들어갔다.
어두운 구석에 앉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던 날들.
“하나님, 저를 구해주세요. 아빠를 데려가 주세요.”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다연은 그곳에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누군가 들어주든 말든, 그건 상관없었다.
인아와 함께 교회 문 앞에 선 다연.
낯익고도 낯선 그 문턱에서, 그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감정이 쏟아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오래 닫혀 있던 무언가가, 이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