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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폭력의 그림자 속에서, 사랑을 배웠다

닫힌 문 안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

by 소망안고 단심

아침이라고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다연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정신이 몽롱해 눈을 비비며 다용도실로 향한다.


하얀 머그잔 안에 뜨거운 물을 붓자

스푼이 만들어내는 물결 따라 커피가 번진다.

검은색으로 퍼지는 그 물결을 바라보며

다연은 문득 생각했다.


‘뜨겁고 쓰디쓴 내 인생 같네.

그래도 향만큼은 따뜻하잖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냄새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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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커피 향을 느끼던 순간,

문이 ‘철컥’ 열리며 누군가 급히 들어왔다.


“다연 씨, 미안해요.

아침에 보자고 해놓고 내가 늦었네.”


김 선생님이었다.

젖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퉁퉁 부은 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지 않았다.

다연의 감각이 먼저 알아챘다.

‘무슨 일 있구나….’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다연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머리도 덜 말리셨는데 감기 걸리겠어요.

몸 좀 녹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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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은 두 손으로 잔을 꼭 감싸 쥐었다.

따뜻한 커피라기보다,

그 온기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망설이는 김 선생님


다연은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감싸고 있는 김 선생님의 두 손을 바라봤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불안하구나.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구나.’

다연은 그 마음이 전해졌다.


김 선생님이 위, 아래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연 씨가 상담 선생님이잖아요.

그래서요… 저 좀 들어주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줄 알고 재혼을 했어요.

근데 몇 달 지나니까, 어느 날부터 달라졌어요.”


‘역시나.’

다연은 속으로 짧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두 눈을 가린 양손 밑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느끼는 어깨, 떨리는 목소리.


“그날 외식하고 왔는데, 술을 너무 마신 거예요.

현관문 닫자마자 소리 지르고,

아이들 방에 가두고… 저를 때렸어요.”


다연은 커피잔을 꼭 쥐었다.

‘또 술이지. 그리고 폭력이지. 젠장할, 나쁜 놈.’


하지만 생각을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남편분은.”


흐느껴 울던 김 선생님이 다연을 바라봤다.

다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삶이 그 사람을 만드니까요.

남편분의 삶을 알면,

왜 폭력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은 김 선생님의 남편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앉은 다연은

폭력 속의 피해자가 아니라, 상담사였다.


그래서 결국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남편분… 많이 힘들었나 봐요.”


그 순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뭐야… 왜 내가 그 인간을 이해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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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다연은 교회에 있었다.

어제 인아와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섰던 그곳.


이번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하나님… 왜요.

오늘 김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제 아버지가 생각났을까요?”


눈물 속에서 다연은 중얼거렸다.

“하나님, 김 선생님 남편의 삶이 이해가 되었어요.

물론 폭력은 절대 용서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인생이, 우리 아버지의 삶과 너무 닮아 있었어요.

그런데 왜 저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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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의 흐느낌이 점점 커졌다.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건 결국 제 마음이에요.

김 선생님의 남편은 타인이니까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아버지는… 제 마음 그 자체였으니까요.”


울음과 함께 어깨가 들썩였다.


그때였다.

장의자 앞에 서 있는 아버지.

아버지가 다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쓰다듬는다.

그 온기가 느껴졌다.


다연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들자,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

강대상 위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 한쪽에서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하나님,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던 건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에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저를 지켜줘야 하는 존재였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가슴속 무언가가 무너졌다.


“이제야 알겠어요.

아버지도… 불쌍한 사람이었네요.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해서

사랑할 줄, 지켜줄 줄 몰랐던 사람.”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닫혀 있던 문이,

그날 처음으로 조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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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