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다시 만난 상처, 그리고 처음으로 꺼낸 진심
병원에서 돌아온 다연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생각 없이 전화를 받자,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너 병원 가서 연희한테 뭐라고 한 거야?”
대답할 틈도 없었다.
“넌 왜 항상 가족들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니?”
“연희가 얼마나 불쌍하면… 죽을 생각까지 했겠어. 그건 생각도 안 해봤지?”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고조됐고, 말은 빨라졌다.
언제나처럼, 다연의 말은 들을 기회조차 없이 모든 잘못이 그녀에게로 몰렸다.
“그건 연희의 말이고,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끊을게요.”
뚝—
엄마가 뭐라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엄마와의 대화는 늘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다, 결국 다연의 침묵으로 끝났다.
전화를 끊자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다연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고, 시야엔 하얀 천장과 조명이 번져 보였다.
눈부신 조명을 바라보는 순간, 오래 전의 별빛이 떠올랐다.
어릴 적, 교회 친구들과 함께 갔던 시골 수련회.
그곳에서 다연은 처음으로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
술주정과 폭언이 닿지 않는 곳,
아무도 자신을 다그치지 않는 곳.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그 사이로 별빛은 유난히 밝았다.
별빛 아래에서 단짝 친구 진숙이와 손을 잡고 누웠던 그 밤.
자상한 아버지, 고운 어머니,
고집쟁이 여동생과 말썽꾸러기 남동생이 있던 진숙의 가족.
크리스마스마다 반짝이는 트리와 가족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집.
그 모든 게 다연에겐 꿈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다연은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요? 왜 저를 만드셨어요?”
그 질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마음속 깊이 박혀버렸다.
눈을 감은 다연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 하나가 꿈속에서 되살아났다.
꿈속에서, 다연은 초등학생 시절의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뺨을 때리고, 손끝이 시렸다.
학교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선생님께 불려 갔던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창피하단 말이야. 달라니까…”
다연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건 떼쓰는 게 아니라, 마지막 기대였다.
“돈이 어디 있어. 다음 달에 줄게.”
엄마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부엌으로 걸어갔다.
“엄마…!”
다연은 발로 현관 바닥을 콩콩 찧으며 울부짖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나 좀 봐!”
하지만 엄마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답도, 시선도, 위로도 없었다.
그 무관심한 뒷모습이, 어린 다연에게는 세상의 문이 ‘탁’ 하고 닫히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정적을 가르며,
엄마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이기적인 계집애!”
그 말은 공기를 갈라 다연의 가슴에 꽂혔다.
돈이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엄마의 무관심한 뒷모습과 ‘이기적’이라는 그 한 마디가,
어린 다연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새겨졌다.
“이기적인 계집애…”
그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순간,
다연은 벌떡 눈을 떴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침대보는 눈물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다연은 이불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그래, 내가 이기적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눈앞에는 아무도 없지만, 엄마가 있는 것처럼 말이 쏟아졌다.
“아니야… 난 이기적인 게 아니었어.”
“살기 위해서였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았잖아!”
“그래서 나라도 나를 지켜야 했어. 그게 이기적인 게 아니라… 개인주의였다고.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다연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나를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는데, 내가 무너지면 누가 나를 세워줘? 아무도 없었잖아…”
그리고 쌓여 있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중·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도, 회사 다니면서 받은 월급도 전부 가져가놓고…”
“민호랑 결혼할 때는 준비금 한 푼도 안 줬잖아!”
“내 건 다 빼앗아가면서, 왜 내가 이기적이야? 왜!”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소리치며, 마치 그날의 엄마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때의 나는… 단지 살고 싶었어.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야.”
“그런 나를, 너희는 이기적이라고 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다연의 어깨가 떨렸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이 방 안 가득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어린 시절에 꾹꾹 눌러 담았던 ‘그날’이 마침내 현재로 터져 나왔다.
이제 다연은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스스로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별빛 아래에서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상처를 ‘직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