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한 사람들과, 끝내 용서하지 못한 나
추운 겨울이었다.
술에 만취한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연이와 엄마를 뒤에 태웠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다니던 연희가
어느 날부턴가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아예 집에 오지 않자,
아버지는 연희를 찾아야 한다며 공장 부근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달리는 오토바이 뒤로 불어오는 바람이 다연의 뺨을 때리고,
바람에 섞인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이 막힐 만큼 불쾌했다.
비틀거리며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역겨웠고,
그 뒤에서 힘없이 앉아 있는 엄마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마저 견디기 힘들었다.
동네 개들이 오토바이 소리에 미친 듯 짖어댔다.
그 소리는 다연의 귀를 찢는 듯했다.
“새벽에 어떤 놈이야?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해!”
술에 취한 동네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연은 숨을 죽였다.
아버지가 들으면 오토바이를 세우고 싸움이라도 벌일까 봐.
다행히 아버지는 못 들었는지 그냥 달려갔다.
“야, 이 계집애야! 얼른 찾으란 말이야.
너는 네 동생이 걱정도 안 되냐?
이기적인 년! 네 동생은 너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공장에 다니는데,
너는 집에 처박혀 잘 먹고 공부만 하냐? 나쁜 년!”
아버지는 자신의 무능력을 다연에게 퍼부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
내가 돈 벌라고 했어? 공장에 가라고 했어?
아버지가 벌지 못해 딸을 공장에 보냈으면서 왜 나한테 화를 내?’
목까지 차올랐지만, 다연은 꾹 삼킬 수밖에 없었다.
추운 새벽,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닌 끝에 연희를 찾았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남자와 작은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바지 허리띠를 풀어 연희와 남자를 마구 때렸다.
‘철썩— 철썩—’
살을 찢는 듯한 가죽 소리.
“잘못했어요, 아빠. 살려 주세요…”
연희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남자는, 자신을 때리는 사람이 여자친구의 아버지라는 걸 알자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 맞고만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버지에게 맞는 연희의 모습.
고소하다는 생각이 스칠 법도 했다.
하지만 그 허리띠가 언제 자신에게도 날아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모든 감정을 집어삼켰다.
연희가 맞고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엄마.
그날은 지옥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
포악한 괴물의 사냥 앞에서
엄마도, 다연도, 연희도, 한 남자도 꼼짝없이 당할 뿐이었다.
작은 아파트, 괴물이 살던 그 집 거실 벽에는
언제 찍은 건지도 모를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청바지와 흰 티셔츠를 맞춰 입고
연희와 남동생, 엄마, 아버지 네 명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다연은 사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일을 당하고도 아버지가 용서가 될까?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함께 웃을 수 있지?’
‘내가 잘못된 걸까?
나만 속이 좁아서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총에 맞은 남동생도, 허리띠로 맞은 연희도 아버지를 용서하는데,
왜 나만?’
다연은 아버지를 용서한 동생들도,
끝내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진 속 연희의 얼굴은 환히 웃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연희는 순했다.
행동도, 말도 느리고,
엄마가 출근하면 어린 연희가 밥을 하고 집안을 치웠다.
엄마가 퇴근하면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끊임없이 엄마와 대화했다.
반면 다연은 집에 있는 게 답답했다.
엄마를 돕고 싶지도 않았고,
늘 해가 질 무렵에야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그런 다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게 들어오는 딸에게 한마디라도 하면
다연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신경 꺼”라고 짧게 잘라 말했다.
엄마는 다연을 불편해했다.
말투와 행동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엄마도, 아버지도
다연보다 연희를 더 예뻐한 건 당연했을지 모른다.
다연은 늘 연희에게 미안했다.
자신 때문에 연희가 학교를 그만두었고,
자신은 연희 덕분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 연희가
미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다연은 다시 사진 속 연희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웃던 얼굴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니… 남편이 아빠랑 똑같아.
술만 먹으면 술주정을 해…”
울먹이며 토로하던 연희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한 걸까?
다연은 사진 속 연희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웃던 얼굴이 울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미움과 질투,
말하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지금의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버지가 남긴 그림자가
끝내 자신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공포였다.
‘나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채
연희처럼 또 다른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다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흰 천장 아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동생에게 건넬 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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