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그림자, 그리고 자매의 균열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퇴원한 다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엄마도 동생들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물론 다연도 그들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았다.
드르르—
핸드폰의 진동이 책상 위를 울렸다.
화면에 뜬 두 글자. “엄마.”
다연은 곧바로 수신 거절을 눌렀다.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업무에 몰두했다.
사무실 밖 학원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야,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와!”
“나 돈 없어. 네가 사라니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용히 좀 하지… 계산이 틀리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서 일하던 민숙 선배가 다연을 바라봤다.
“다연아,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다른 다연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순간 다시 울리는 진동.
“엄마.” 두 글자가 또렷하게 떠 있었다.
다연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칫거렸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엄마의 목소리는 감정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떨림이 묻어났다.
“다연아, 듣고 있니?”
“네.” 짧게 대답하는 다연.
“다연아, 병원으로 좀 와야 할 것 같아.”
“… 왜요?”
다연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연희가… 병원에 입원했어.”
“입원했는데 어쩌라고요? 내가 왜 가야 하죠?”
차갑게 쏘아붙이는 다연.
그럼에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갔다.
“아니… 연희가 자살을 시도했어.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다연은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누운 채 몇 시간째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은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눈을 찌르는 흰색이 차갑게 내려앉아, 마치 자신을 심문하는 듯했다.
“이놈의 집구석…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어.
지가 뭐가 부족해서 자살까지 하겠다는 거야?”
투덜이듯 내뱉은 말.
그러나 곧 어린 시절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새벽, 다연의 방 너머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놀란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날, 아버지의 누이인 큰고모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었다.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엄마가 중얼거렸다.
“큰 형님도 자살로 돌아가셨다 했지?
큰 형님이 고모를 데리고 가려했나 봐…”
형제들이 번갈아 자살을 시도하는 집안.
그리고 그 속에서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
주변에서는 아버지에게 ‘신기(神氣)’가 있다고 수군거렸다.
‘신기가 있는 사람이 죽으면 자식에게 물려간다.
특히 가장 닮은 자식에게.’
다연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말은 늘 가슴 한구석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게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리고 지금, 여동생 연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행이네. 내가 아니라서…”
입술을 앙다물고 중얼거렸지만,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결국 다연은 병원으로 향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고향으로,
아버지의 장례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고모. 연희가 남편이랑 싸우고 집을 나갔는데…
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대요. 처음엔 사고인 줄 알았는데,
블랙박스 보니까 차 안에서 ‘죽을 거야! 나 죽을 거라고!’라고
소리를 지르더래요. 결국 경찰도 자살로 결론 내렸어요.”
엄마의 통화 내용을 듣는 다연의 시선이 벽에 걸린 사진으로 향했다.
가족사진 속에서,
아버지의 커다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사진 속 입술이 움직이는 듯 보였다.
“동생보다 못한 년.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
다연의 귓가에 맴도는 건 술 취한 아버지가 늘 퍼붓던 말이었다.
“네 동생은 너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고 공장에 다니는데, 넌 뭐 하는 년이야!”
“아이고 불쌍한 내 딸 연희야! 아빠가 못나서 우리 딸 학교도 못 보냈네…”
그때의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든 채 벌을 서 있었다.
바로 옆, 같은 공간에서
연희는 아버지 무릎에 앉아 “아빠 딸!”이라고 대답하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같은 아버지의 두 얼굴은 내 마음에 깊은 금을 그었다.
나의 아버지는 괴물이었고,
연희의 아버지는 천사였다.
연희는 아버지의 사랑에 기대어 살았고,
나는 그 폭력에 짓눌리며 버텨야 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딸이 죽음을 택하려 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 그림자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다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한 내가,
과연 내 동생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아니, 정말 내가 끌어안아야 하는 걸까?”
대답은 쉽지 않았다.
그저 천장이 다시 눈앞에 겹쳐졌다.
차갑고 눈부신 흰색, 그 아래 서 있는 자신.
그리고 그 옆, 흐릿하게 서 있는 연희의 그림자.
그 순간, 다연은 깨달았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끝은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