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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사랑받는 자와 버려진 자

가족의 그림자, 그리고 자매의 균열

by 소망안고 단심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퇴원한 다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엄마도 동생들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물론 다연도 그들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았다.


드르르—

핸드폰의 진동이 책상 위를 울렸다.

화면에 뜬 두 글자. “엄마.”

다연은 곧바로 수신 거절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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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업무에 몰두했다.

사무실 밖 학원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야,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와!”

“나 돈 없어. 네가 사라니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용히 좀 하지… 계산이 틀리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서 일하던 민숙 선배가 다연을 바라봤다.

“다연아,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다른 다연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순간 다시 울리는 진동.

“엄마.” 두 글자가 또렷하게 떠 있었다.


다연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칫거렸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엄마의 목소리는 감정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떨림이 묻어났다.

“다연아, 듣고 있니?”

“네.” 짧게 대답하는 다연.


“다연아, 병원으로 좀 와야 할 것 같아.”

“… 왜요?”

다연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연희가… 병원에 입원했어.”

“입원했는데 어쩌라고요? 내가 왜 가야 하죠?”

차갑게 쏘아붙이는 다연.


그럼에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갔다.

“아니… 연희가 자살을 시도했어.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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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다연은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 소파에 누운 채 몇 시간째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은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눈을 찌르는 흰색이 차갑게 내려앉아, 마치 자신을 심문하는 듯했다.

“이놈의 집구석…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어.

지가 뭐가 부족해서 자살까지 하겠다는 거야?”

투덜이듯 내뱉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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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어린 시절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새벽, 다연의 방 너머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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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날, 아버지의 누이인 큰고모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었다.

응급실에 실려가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엄마가 중얼거렸다.

“큰 형님도 자살로 돌아가셨다 했지?

큰 형님이 고모를 데리고 가려했나 봐…”


형제들이 번갈아 자살을 시도하는 집안.

그리고 그 속에서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

주변에서는 아버지에게 ‘신기(神氣)’가 있다고 수군거렸다.

‘신기가 있는 사람이 죽으면 자식에게 물려간다.

특히 가장 닮은 자식에게.’


다연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말은 늘 가슴 한구석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게 바로 자신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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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여동생 연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행이네. 내가 아니라서…”

입술을 앙다물고 중얼거렸지만,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결국 다연은 병원으로 향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고향으로,

아버지의 장례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고모. 연희가 남편이랑 싸우고 집을 나갔는데…

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대요. 처음엔 사고인 줄 알았는데,

블랙박스 보니까 차 안에서 ‘죽을 거야! 나 죽을 거라고!’라고

소리를 지르더래요. 결국 경찰도 자살로 결론 내렸어요.”


엄마의 통화 내용을 듣는 다연의 시선이 벽에 걸린 사진으로 향했다.


가족사진 속에서,

아버지의 커다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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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사진 속 입술이 움직이는 듯 보였다.


“동생보다 못한 년.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

다연의 귓가에 맴도는 건 술 취한 아버지가 늘 퍼붓던 말이었다.

“네 동생은 너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고 공장에 다니는데, 넌 뭐 하는 년이야!”

“아이고 불쌍한 내 딸 연희야! 아빠가 못나서 우리 딸 학교도 못 보냈네…”


그때의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든 채 벌을 서 있었다.

바로 옆, 같은 공간에서


연희는 아버지 무릎에 앉아 “아빠 딸!”이라고 대답하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같은 아버지의 두 얼굴은 내 마음에 깊은 금을 그었다.

나의 아버지는 괴물이었고,

연희의 아버지는 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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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는 아버지의 사랑에 기대어 살았고,

나는 그 폭력에 짓눌리며 버텨야 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딸이 죽음을 택하려 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 그림자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다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한 내가,

과연 내 동생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아니, 정말 내가 끌어안아야 하는 걸까?”


대답은 쉽지 않았다.

그저 천장이 다시 눈앞에 겹쳐졌다.

차갑고 눈부신 흰색, 그 아래 서 있는 자신.

그리고 그 옆, 흐릿하게 서 있는 연희의 그림자.


그 순간, 다연은 깨달았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끝은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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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