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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지울 수 없는 상처, 용서라는 질문

행복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건 용서일까 증오일까?

by 소망안고 단심

하얀 병실.

창가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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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은 잠에서 깼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 본 민호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사라지는 그의 얼굴이 아쉬웠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민호의 심장소리가 가슴을 쿵… 쿵쿵… 울렸다.

민호의 품은 너무도 따뜻했고,

그 품에서 처음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기분을 알았다.

원망과 미움만 가득했던 다연의 마음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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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실에 누워 있는 현실은 냉정했다.

민호도, 그의 품도, 그리고 그 따뜻한 사랑의 마음도 없었다.

차갑게 삐삐 거리는 기계음,

무표정한 간호사의 목소리,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의 대화 소리,

시끄럽게 혼자 떠드는 TV소리,

그리고 약 냄새만이 다연의 곁에 남아 있었다.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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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눈물이 처음 시작된 날이 떠올랐다.

민호와는 고등학교 시절 만났다.

버스 터미널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막차 시간까지 수다를 떨며 웃었다.

처음으로 다연에게 웃음과 행복을 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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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가 군에 가 있던 시절,

아버지의 폭력은 더 거세져 도가 지나쳐 갔다.




어느 날 이른 새벽,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다연.

혹시 아버지가 술에 취해 온 것은 아닌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숨죽이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다연아! 자니?”

엄마의 목소리였다.


다연은 혹시 아버지랑 함께 왔을까 두려워

이불속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누나! 아빠 안 왔어. 엄마랑 나만 왔어. 문 열어봐!”

눈치 빠른 남동생의 목소리였다.


가슴속 얼어붙은 긴장이 조금 풀렸다.

다연은 문을 열기 싫었지만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순간,

기숙사 방 안으로 ‘푹’ 쓰러지는 남동생.

바지와 손에 피가 묻어 있었고,

찢어진 바지 속에서 다리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엄마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신발도 제짝이 아닌 것을 신고 있었다.


‘아… 아버지가 술에 취해 또 난장판을 피웠구나.’

집에 사냥총이 있었다.


허가는 사냥용이었지만, 아버지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 총은 가족을 겁주는 협박용이었다.


그날, 그 새벽.

술에 만취한 아버지는 남동생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엄마와 남동생은 목숨을 걸고 도망쳐 다연의 기숙사까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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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숙소까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군 제대 후 다연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민호와 다연은 함께 살았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민호의 집 앞까지 와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그날 이후 민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처음에는 밤늦게까지 술만 마시던 민호가

점점 말을 잃어갔다.


그런 민호의 모습을 보며 다연은 괴로운 마음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다연의 술 냄새를 맡을 때마다 민호는 눈을 피했다.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1년 후,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미 둘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민호는 집에 늦게 들어왔고,

다연은 민호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러나 마음은 매일 무너졌다.


다연은 술에 의지했다.

밤새 술을 퍼마셔도 배신감은 씻겨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호를 미워할 수 없었다.


민호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술에 취해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다연에게 손찌검을 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담배를 얼굴에 던지는 아버지.


민호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

민호 어머니의 불편한 시선까지.

‘다연만 없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민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결국 다연은 결심했다.

민호를 위해 떠나기로.


짐을 챙겨 나오는 다연의 다리를 붙들고 민호가 울었다.

“다연아…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왜 그랬어? 내가 그렇게 싫었어?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만나?’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조용히 속으로만 말했다.

‘민호야… 나도 널 사랑해. 하지만 우리 둘 다 너무 지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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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의 하얀 천장이 흐려졌다.

어느새 베개는 다시 젖어 있었다.


“그때 떠나지 말 걸… 민호 옆에 있을 걸…”

다연의 가슴이 다시 한번 찢어졌다.

“나 너무 괴롭고 힘든데, 꿈속에 나타나지 말지.

잊고 잘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인해 고향에 오랜만에 갔던 다연.

고향은 다연에게 두 얼굴을 가진 곳이었다.

첫사랑 민호를 생각하게 하는 따뜻한 고향.

하지만 아버지로 인해 지옥 같았던 고향.


“고향에 갔다 와서 그래… 그래서 민호가 꿈에 나타난 거네.”

다연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얼른 퇴원하고 집에 가자.

그리고 이제 아버지도 없고, 엄마랑도 연락할 필요 없으니

이제 나 혼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자. 잘 살자.”


다연은 혼자 자신을 달래고 또 달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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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