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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그 사람

처음 알게 된 따뜻함, 그러나 잃어버린 이유

by 소망안고 단심

민호.

다연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


가족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집안의 고통,

폭력과 공포 속에서 숨죽이며 살던 시절,

민호는 묵묵히 다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버스 터미널 벤치에서, 어둑한 밤공기 속에서,

다연은 민호 앞에서만 웃을 수 있었다.


“행복해도 되나?”

그때 늘 불안해하며 스스로에게 묻곤 했던 말.

다연은 마음속으로 대답했었다.

‘민호와 함께라면, 그래도 괜찮아.’



“다연아! 일어나. 약 먹고 자자.”


낯익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호였다.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구김 하나 없는 하얀 티셔츠,

선한 눈빛,

그리고 언제나 다연을 지켜주던 그 얼굴이 있었다.

민호는 수건을 차갑게 적셔 이마에 올려주었다.

타들어가듯 뜨거웠던 열이 서서히 식었다.

숨이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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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의 품에 안긴 순간,

다연은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품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를 알았다.


엄마의 무릎에도 안겨본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팔은 언제나 폭력으로 다가왔었다.

다연에게 ‘품’이라는 것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민호의 품은 울타리 같았고,

심장소리는 귓가에 다정한 리듬처럼 속삭였다.

쿵, 쿵쿵… 마치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

다연은 그 심장소리에 맞춰

자신의 심장도 뛰고 있다는 걸 느꼈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크게 호흡했다간

이 행복이 산산이 흩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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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지금 처음으로… 딸이 아닌 여자로, 누군가의 사랑받는 존재로 서 있구나.”

다연의 가슴 깊숙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민호의 향긋한 티셔츠 냄새가

서서히 씁쓸한 알코올 냄새로 변해갔다.

따뜻한 품은 점점 식어가고,

심장소리는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민호야…”

다연은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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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삐—

기계음이 귀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눈을 떴을 때,

다연이 본 것은 하얀 병원 천장이었다.

민호도, 그 따뜻한 품도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쓰러져 계신 걸

지나가던 분이 119에 신고하셨어요.

병원에 오신 지 이틀 되셨어요.

며칠 동안 못 드시고 과로하셔서

저혈당과 급성 쇠약 증상으로 치료 중이에요.”

간호사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공중에서 흩어지듯 맴돌았다.

“이틀 동안… 못 드셨다”는 말이 돌덩이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민호의 품이 그리워 굶은 걸까,

아니면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서였을까.

어느 쪽이든, 그 모든 이유가 너무 가슴 아팠다.


‘꿈이었구나.

민호였구나.

겨우, 겨우 꿈에서라도 다시 만났는데…’




다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시 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민호의 품, 민호의 심장소리,

민호의 향기 속으로.


그러나 마음 한편이 비통하게 울었다.

민호와 멀어지게 만든 것도,

결국 그 인간 때문이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괴물.

술 냄새와 담뱃불, 욕설이 합쳐져

다연의 유년 시절을 잠식해 버린 괴물의 얼굴.

그 존재가 아니었다면,

민호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민호는 다연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행복마저 빼앗아간 사람이었다.


“보고 싶다, 민호야.”

그리움에 목이 메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귓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그 심장 소리를

다시 한번 꼭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용서해야 할까, 그 사람을.”




⏳ 다음 회차 예고

“잊고 살았던 기억 속, 그 사람은…

내가 외로울 때마다 속삭여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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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