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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나는 아직,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흔들린 딸의 기록

by 소망안고 단심

가끔은 머릿속 기억들이 불쑥 떠오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인데, 마음과 기억은 따로 움직입니다.


환하게 웃으며 외딴집으로 걸어오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훤칠한 키, 또렷한 얼굴

연탄가스에 정신을 잃은 저를 업고 병원으로 달리던 그날,

절박한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어릴 적 저는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며 동네 입구에 서 있곤 했습니다.

아빠의 편지를 기다리는 어린 마음은 그렇게 간절했습니다.

편지 속 아빠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사진 한 장을 보며 울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공항에서 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기다리던 날도 기억납니다.

그때의 설렘이 아직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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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도 많네요.


이제는 그 기억을 붙잡고, 왜 우리 집이 지옥이 되었는지를

차근히 써보려 합니다.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빠가 귀국한 뒤, 모든 것이 조금씩 변했습니다.

술 냄새가 집안을 메우기 시작했고,

엄마에게 쏟아지는 분노가 점점 거세졌습니다.


타지에서 고생하고 돌아왔지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아빠를 화나게 했던 걸까요.

그때 저는 아빠가 무섭고 미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외로운 타국에서 몇 년을 고생했는데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


저라도 억울했을 겁니다.

이제야 전합니다.

아빠, 외로우셨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너무 어려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빠의 분노는 우리에겐 공포였고,

작은 집 안의 소리는 세상 전체의 폭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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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아빠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엄마가 벌어온 돈은 술값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린 저는 그 모습을 보며 다짐했습니다.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 나는 꼭 성공하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아빠의 좌절 뒤에는 상처가 있었다는 걸요.

공부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던 어린 시절,

형만 학교에 보내고 자신은 쌀을 훔쳐 집을 나왔다던 이야기.


“우리 다연이는 공부 잘하라”던 그 말이

이제는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아빠의 선택들은

우리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 무렵부터였을까요.

학교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심장이 요동쳤습니다.

하교 전 종이 울리기 직전,

가슴이 쿵쿵 뛰고 귀에서는 ‘윙—’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습니다.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그 공포는 몸으로 먼저 찾아왔고,

그게 제 마음의 병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매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빠를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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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제가 번 돈을 빼앗아 가셨고,

그건 제가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쳤습니다.


그곳에는 저를 진심으로 아껴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제 마음을 이해해 주던 사람이었죠.

하지만 아빠는 그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민호를 모욕했습니다.

그날 이후 민호는 제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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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아마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그날 이후 저는 세상을 믿는 법을 잃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또 도망쳤습니다.

아빠가 올 수 없는 타지로.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빠의 목소리는 여전히 저를 찾아왔습니다.

술에 취한 목소리가 새벽마다 전화선을 타고

제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울며 돌아누운 밤들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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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누군가 죽지 않으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내가 죽든, 아빠가 죽든.

그게 유일한 해방이라 믿었습니다.


지금은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났지만

제 마음은 아직 그 시간에 갇혀 있습니다.


분노는 설움으로, 설움은 다시 불신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문득 깨닫습니다.

나는 아빠를 닮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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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압니다.

아빠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아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요.


하지만 용서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숙제를 주셨을까요.

왜 우리는 부녀로 태어났을까요.


오늘도 묻습니다.

어떻게 아빠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용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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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