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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anca Sep 29. 2020

내가 기억하는 시어머니 욜레 (IOLE)

“이탈리아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결혼한 여자에게는 누구나 시어머니가 존재한다.  

나에게도 시어머니가 있었다.


나는 이탈리아인과 결혼했고 시어머니와는 12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   그 시간 중 6년 넘게는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밥 먹고 - 빵 먹고 가 더 맞는 말임 - 동고동락하였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신 지가 어언 몇 년이 지났지만...


우리 시어머니는 칼라브레제. (calabrese.  이탈리아 남부의 장화 앞쪽에 해당하는 칼라브리아 Calabria의 사람)   칼라브리아는 바다가 아름답고 칼라브리아 인들은 매운 음식을 먹으며 고집불통의 지역 성향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14살부터 칼라브리아 고향에서 라틴어로 미사를 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 후 로마에 정착하여 60여 년이  넘게 살았지만 항상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했던 분이었다.

1921년생이었고 약의 조제를 직접 했던 약사 출신의 경력으로 약의 성분들을 화학명으로 꿰차고 계셨던 분.

당신의 아버지께서 의대, 약대, 화학과를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다며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던 분.

당신의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며 평생을 사셨던 분.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내 남편) 심히 넘치도록 사랑하셔서 때로는 나를 몹시도 힘들게 하셨던 분이었다.


나는 그런 시어머니를 부를 때 “Mamma”  우리말로 “엄마” 라고 불렀다.   이태리 말로 수오체라 (suocera)는 시어머니, 장모님의 뜻인데 호칭은 아니다.

.

그녀는 키가 유난히 작았고,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신라면’을 참 좋아하셨고 계란 프라이를 할 때에도 굵은 마른 고추를 흩뿌려 드셨다.    전형적인  칼라브리아 스타일로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와 규범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에는 관용과 이해가 통하지 않는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지방 사람들의 특징인 끈끈한 모자간의 지나친 연착 관계가 나로 하여금 숨을 턱턱 막히게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도 하였다.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문화와 모계사회의 성향이 강한 이탈리아지만 거기에 더해 시어머님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우리나라의 남존여비 사상을 물색케 할 정도였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양사람들은 우리와 다를 것이다라는 나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이겠지....

나의 시누이도 엄마의 아들에 대한 끔찍한 사랑에 마치 ‘후남’이 같은 피해의식으로 나와 공범이 되어 같이 흉보기를 하면서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남편은 어머니와 같은 성격이라 두 사람은 종종 부딪쳤지만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혼자되신 어머니를 홀로 사시게 남겨 두지 않았다.   우리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나에겐 거의 반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마치 내가 나쁜 며느리같이 생각되었다.


시부모님이 사시던 집의 내부수리를 완전히 하게 되어 시어머니는 세 달 정도의 집수리 기간 동안 우리의 작은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우리 시누이가 우리 집에서 200 미터 옆에 살고 있었고 엄마의 도움을 더 필요로 했지만 시어머님은 딸 집보다 아들네에 꼭 있어야 한다고 당신 스스로 생각하셔서 우리 집에서 꼼작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께서 임시로 계시던 우리 작은 집의 가구를 정리해서 팔게 되었고 새로 수리한 집으로 이사 가기 까지가 이틀이 남았다.   이제 주무실 침대가 없어져서 어머니께서는 할 수 없이 당신의 딸 집에 억지로라도 가서 이틀 밤을 보내야 했다.


저녁까지 우리와 함께 다 드시고 딸 집에 간 어머니.

속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자유함을 누릴 사이도 없이 다음날 아침 7시에 초인종을 누르신다.

이틀이 머다 하고 하룻밤을 지내자마자 아들네로 달려오시는 어머니.

시누이와 나는 똑같이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집의 내부수리가 끝나자 우리 세 식구와 시어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나의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집수리를 하면서 많은 오래된 가구(적어도 40년 이상은 된)와 물건들을 버리면서 남편과 어머님의 충돌이 있었고 심지어 거실의 가구 위치를 바꾸는데도 언성이 높아졌다.   어머니는 자신이 50년 가까이 살던 집안을 바꾸는 것에부터 탐탁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나 이탈리아인들은 오래된 물건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별나다.   그래서 역사가 잘 보존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7월의 한여름 오후 선풍기를 켜도 한 마디 들었어야 했고(에어컨디션이 버젓이 있지만)  두꺼운 두 겹짜리 냅킨을 샀다고도 한 소리 들어야 했다.   시장을 보는 물품들도 어머니가 원하는 것들을 사야 했다.  모든것이 당신의 뜻과 생각에 벗어나면 나는 그녀의 잣대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 커피를 마시러 드라이브를 할 때도 항상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 제일 먼저 외출 준비를 하셨고 여름철 바닷가를 갈 때도 함께  하였다.   우리 가족만의 외출은 없어졌다.  


남편이 늦은 귀가를 할 때면 거실의 창문가에 앉아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아들을 확인하고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얼른 문을 열어 놓고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다.   새벽 2 시건 3 시건 늦은 퇴근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잠자리에 들으셨다.  평상시엔 당신의 아들에게 마치 그 아내가 된 듯이 집안의 일들을 상의했다.   집안에서 나는 점점 할 말을 잃어갔고  남편과의 대화도 점점 줄어들어갔다.   집안에서 나는 피부색이 다르고 다른 언어를 쓰는 이방인처럼 생각되었다.


photo by Matthew. Henry  on Unsplash

시아버님의 부재와 그리움이 당신의 아들에 대한 더 지극한 관심으로 옮겨진 것을 나는 알아챘고 감내해야 했다.

어머님은 당신의 아들이 결혼을 해서 어엿이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현실로 고려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 혼동은  나에게 날카로운 파편들로 날아와 여기저기 상처를 주었다.


당시 전업 주부였던 내게는  낮에도 시어머니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편치 않은 사람과 시간과 한 공간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늘 누군가의 감시하에 있는 듯한 무거운 눌림에 압사할 것 같은 심정이 되어갔다.  같이 하는 점심 식사도 괴로운 시간이 되었다.  급기야 나는 빠니노 (챠바타같은 빵 안에 햄 등을 넣어서 만든 것)를 만들어서 공원 벤치에 가서 먹기까지 하는 상태가 되었다.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일단은 집을 나가기 위한 합리적인 구실로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영국 문화원에서 하는 영어 코스에 등록을 하여 정당하게 일주일에 두 번을 외출했다.  그리고 천천히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미 전공을 손 놓은지도 몇 년이 지났고 내 나이도 어느덧  마흔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집에서 나가기 위한 구실로 지인의 소개를 받아 로마 시내에 있는 기념품 가게의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때때로 특정한 여건의 현실은 다른 새로운 환경 안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일을 하게 되면서 시어머니와의 갈등도 많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나는 시장 보는 권한을  기꺼이(!)  돌려 드리고 부엌의 살림살이를 어머니께서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의 문화에 비추어 보면 완전히 반대이다.   나의 시어머님은 우리 가족과의 동거를 하면서 자신의 할 일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한 가지 내가 깨달은 진실은 한 주방에 두 여자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

한 공간에서  주거를 같이 한다는 일이  나의 ‘자유’가 침해당한다는 사실과 직결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피부에 각인했다.

나는 부엌의 주인 자리를 어머니에게 양보해 드리고 직장생활에 더 중점을 두는 것으로 나의 탈출구를 찾았다.




내게 가장 깊이 남아있는 시어머님에 대한 기억은 항상 부엌에서 음식을 하시는 모습이었다.


내가 “저 라자냐를 할까?  하는데요”   하면  욜레 여사는 이미 재료부터 시작해서 만드는 방법까지 줄줄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전수받은 이탈리아 가정식 음식들을 나는 참 많이 배웠다.

대표적인 가지 요리인 파르미자나 멜란자나 (Parmigiana Melangiana)  직접 계란으로 손수 만드시던 생파스타 페투치네 (Fettucine)  손님 접대용으로 준비하시던 아로스토 디 비텔로 (Arrosto di Vitello - 구운 송아지 요리)와 라자냐 (Lasagna), 울 아들이 좋아하는 카르초피 알라 주디아 (Carciofi alla giudia - 아티초크 튀김),  엄마가 아주 좋아하는 피오리 디 주카 (Fiori di zucca  Fritti - 호박꽃 튀김) 등등.....


이탈리아 음식의 재료들은 지중해성 기후에서 재배되어 강한 햇빛의 풍성한 혜택으로 과일들은 높은 당도를 함유하고 다양한 채소들은 왕성한 광합성 작용으로 짙은 초록의 자연색을 자랑하며 아직도 재래시장의 풍성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욜레 여사는 우리 집에서 500여 미터도 채 안 되는 곳의 재래시장을 거의 매일 같이 다녀오시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팔 순이 넘으신 나이에도 본인이 손수 장보는 손수레를 가지고 장을 보시고 하나 가득 쌓아 가지고 돌아오시는 게 그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또 즐거움이었다.

시어머니가 자주 가던 재래시장의 단골 야채 가게 - Cesare (시저)네.  이제는 내가 단골 손님이 되었다.


울 아들이 어렸을 때 어느 날은 이렇게 외친다.

“Tutto 1 Euro, tutto 1 Euro “  -  “모두 1유로, 전부 1유로”


내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나긴 3개월 간의 여름 방학에 손주 녀석을 데리고 매일같이 가던 재래시장의 어느 상인의 모습을 아들이 배워서 흉내 내고 있었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맙소사!!

울 아들도 어느새 제 할머니와 자주 가던 가게들의 꼬마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낮에는 절대 침대에 눕지 않으시던 시어머니께서 종종 낮에도 침대에서 쉬시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어머니는 2011년 봄에 90세의 나이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좋아하셨던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친구에게 부탁하여 장례미사에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고의는 아녔겠지만 살아생전에 나를 무겁게 눌렀던 중압감과 쌓이고 쌓인 삭히지 못했던 원망이 폭발이라도 한 듯이 폭풍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지난 세월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이 나는 내가 찔렸던 가시의 아픔을 되새기기라도 하듯이 꺼~억 거리고 있었다.


장례식이 지나고 내가 아프게 느꼈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갈 즈음.

그녀가 내게서 느꼈을 아픔과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남편을 잃은 노인의 외로움도 희미하게나마 나에게 메아리가 되어 들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와 함께 찾은 재래시장의 단골가게 주인들은 울 아들에게 하나같이 “네 할머니는 잘 계시냐”를 물어 왔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우리 아들에게도 제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대화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잔잔하게 일으켰다.


그 손주 녀석이 제 할머니와 같아진 키로 장보는 손수레를 함께 끌며 손을 잡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모습은 내 기억에 가장 애잔하게 남아있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되었다.









표지 사진 : photo by Alvaro Parra on Unsplash  시어머니께서  좋아하셔서 항상 베란다를 장식했던 제라늄을 골라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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