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외국에 나가면 누구든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한다.
내가 속해있는 사회나 국가의 보호막 안에서 살 때는 몰라도 그 경계를 이탈했을 때는 평상시 느끼지 못했던 당연함에 대하여 다시금 재조명한다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을 떠나 낯선 이탈리아에 오기 전까지 나는 그다지 애국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겉치레 문화와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생활방식에 나를 끼워 맞추기가 때때로 힘겹게 느껴질 때면 나라에 대한 사랑 따위는 나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김새도 다르고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는 곳에 와서 살다 보니 첫 번째 받는 질문이 ‘너 어느 나라 사람이니?’에서부터 시작해서 ‘네 나라에서는 무슨 언어를 사용하니?’ ‘한국은 사계절이 있니?’ 등등 여러 가지 질문들을 받는다.
이제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하게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서는 잘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한국산 가전제품이나 핸드폰이 많이 보급되어 ‘대한민국’ South Korea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아들의 출생 후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자각해야 했다.
아이는 아빠의 성을 이어가긴 하지만 나는 남편과는 확연히 다른 핏줄 다른 나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황인종이고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사람이고 세종 대왕의 창조 언어인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30년이 넘게 수도 서울이란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다. 내가 어린 시절엔 ‘새마을 운동’이 있었고 국민학교(나의 시절엔 국민학교라 했으니) 시절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이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자랐다. 1980년대 중반의 뜨거운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려 최루탄의 매서운 눈물을 흘려가며 대학의 교정을 다녔고 ‘진리와 자유’라는 상아탑 아래서 인생을 논하던 시기를 지냈다.
한국인의 엄마가 되기 위한 나의 정체성의 뒤돌아봄이랄까? 내 현재의 모습은 결국 ‘과거’의 시간과 내가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의 결과물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되었을 무렵 나는 만 1살이 갓 지난 아들을 품에 안고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지켜보았던 때가 있었다. 경기 전날 저녁 텔레비전의 국영 방송에서 한국인 성악가가 불렀던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마라’에 Vincerò! Vincerò! 이기리라! 이기리라! 라는 가사로 끝나는 곡을 불러서 마치 한국의 승리를 암시라도 했던 기억도 난다. 그 당시 나는 혼자서 아들을 품에 안고 TV 앞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손에 땀을 쥐며 흥분했던 나를 경험했었다.
나를 통해 왔지만 전혀 다른 세대를 살아갈 아들에게 나는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까?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엄마 나라의 문화적 배경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엄마에 대한 이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태어나고 자라는 생활환경이 이탈리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나라의 문화에 젖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이에게 전혀 다른 나라에서 온 엄마의 문화도 알게 해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과 있을 때에는 한국말로 주로 대화를 하였고 초등학교를 시작하면서 매주 토요일 오후에 있는 로마 한글학교에 등록하여 한국말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한국 문화를 습득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한글학교는 콜로세움이 바라다 보이는 국립 중학교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토요일 오후를 할애하여 부모도 학생도 로마 시내까지 나와서 한글을 배우려는데 쏟아붓는 정성은 이곳의 현지인들 시각으로는 대단한 것이다. 주말 오후를 자유롭게 보내려는 것은 누구든지 누리고 싶어 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한글학교를 시작하는 토요일 오후.
여름의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9월 중순이었다.
개학 첫날이라 야외의 작은 학교 뜰에서 간단히 개학식을 하였다.
식순에 따라 ‘애국가’를 부르는 차례가 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구슬픈 애국가 가락을 얼마 만에 들어봤는지 까마득했는데 나도 모르게 내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오랜만에 사랑했던 친구를 만나기나 한 것처럼 반가웠다고 할까.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를 마구 흔들었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애국가였던것 같다.
내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마치 스스로에게 인증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들은 엄청난 자동차광이다. 2살경부터 모든 자동차의 상표와 이름들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한 게 그의 말하기의 시작이었고 당연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페라리 FERRARI 의 팬이다. 따라서 전 세계를 순회하며 네 바퀴 자동차의 최고의 속력을 과시하는 포르물라 우노 Formula uno - 자동차 경주를 관심 있게 지켜본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느 날 내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했어? ‘영감’ ?! “
“응, 영감”
“철자가 어떻게 되는데?”
나는 터지는 웃음을 주체 못 하며 분명히 뭔가를 잘못 알고 발음한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 YEONGAM - 영감! 맞잖아요...”
“영감이 아니고 영암이라는 곳이야”
전라남도의 영암에서 포르물라 우노 (포뮬러 원 코리아) 경기가 있었다.
그렇다. 우리나라 발음의 ‘ㅇ’ 받침을 잘 이해 못하는 아들은 ‘영감’으로 철자를 끼워 맞춰 읽었을 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를 한다는 것 자체에서 아들은 뿌듯해지며 업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나의 나라와 문화.
그리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인 언어.
한국어를 통해서 한국문화의 흔적이 그의 가슴에 한 자락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랐던 엄마의 마음.
그 마음과 아들을 향했던 나의 정성이 헛되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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