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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Nov 11. 2021

엄마와 연시(軟柹)

여섯 살 어린이 시절에 홍시맛을 깨우친 엄마의 이야기

엄마는 감을 좋아한다. 엄마가 어린 시절, 시골의 친척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먹은 홍시가 너무 맛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친척 언니에게 이런 감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물었고, 친척 언니는 감나무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엄마는 혼자서 산자락 밑에 있는 그 감나무를 찾아갔다. 터진 홍시는 그 자리에서 먹고, 빈손이었던 여섯 살의 엄마는 그나마 성해 보이는 감을 주워서 웃옷 자락에 담아왔다. 아마 옷이 홍시로 물들었겠지. 어려서부터 감의 맛을 좋아하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위해 나는 가을마다 연시가 저렴해지면 연시를 한팩씩 사다가 엄마를 가져다 드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급식실에서 하루는 석식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에 급식실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연시 더 먹을 사람~!'하고 소리쳤던 적이 있다. 넉넉하게 준비한 연시가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리에 연시를 하나 더 받아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모전여전인가. 나도 연시를 좋아한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나는 맛의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고 뭘 먹어도 맛있게 먹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10월 말부터 연시의 가격이 저렴해졌다. 자주 가는 카페의 옆에는 이름도 없는 과일 채소가게가 있다. 그곳이 가깝다 보니 지나다니다가 제철과일을 보고 가격이 싸면 사먹어보는데, 지난달 운전연수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보니 연시 여덟 개를 삼천 원에 판매 중이었다. 여덟 개 중에 두 개는 특히 더 빨갛게 익어있었다. 그 두 개는 먼저 먹고, 나머지는 햇빛 아래에 더 숙성시켰다가 먹으면 적당할 것이었다. 홀린 듯이 연시 한팩을 사서 집에 가져왔다. 엄마는 올 가을 들어 처음 먹는 연시 맛이 좋다고 하셨다.


다음 날, 오빠네 부부가 집에 방문했다.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시각에 운전 강습이 예약되어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애매해서 아예 일찍 나가서 밖에서 식사를 할 생각이라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아직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일러서, 엄마는 오빠 부부에게 연시를 내어주셨다.

"안 그래도 어제 리아가 연시 사왔다. 내가 연시를 좋아하거든~ 근데 좀 덜 달다."

오빠와 새언니를 향해서 하는 말이 방 안에서 화장 중인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연시가 덜 달다는 말이 내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나도 먹어봤는데, 달던데, 맛있었는데.


난 분명히 엄마가 내가 사온 연시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연시를 대접하면서, 그게 내가 사온 건데 덜 달다는 말을 꼭 했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마치 맛없는 연시를 사온 내가 죄인 취급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엄마한테 서운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남자친구를 만나 이 서운한 감정에 대해 말했더니, 남자친구는 그건 아마도 한상 가득 차려놓고 '차린 건 없지만~'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와는 별개로, 남자친구는 홍시는 아는데 연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남자친구에게도 연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남자친구는 과일을 좋아한다. 걷는 길에 우연히 과일 가게를 마주치면, 남자친구는 이따가 우리 과일 사가자는 말을 하는데 막상 과일을 살 현금이 없거나 장을 보고 나오니 과일가게가 문을 닫는 등 갖은 이유로 과일을 사서 같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남자친구가 과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고, 특히 혼자 자취하는(지금은 회사 기숙사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과일을 사 먹을 여유가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어서 의도적으로라도 남자친구에게 과일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만날 때마다 귤 한 봉지 정도는 쥐어줄 수 있는 계절이 왔다. 하얀 손이 노랗게 될 정도로 귤을 좋아한다는 남자친구는 내가 사다 주는 귤을 매번 맛있게 먹고 있단다.


남자친구한테 연시 맛을 보여줄 생각으로 연시를 한 팩 사오겠다는 내게, 엄마는 곧 연시가 집에 올 것이니 사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가 연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새언니가 연시를 우리 집으로 주문했기 때문이었다(나는 엄마가 연시를 좋아한다는 걸 직접 말씀하셨다고 알려드렸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연시를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했고, 다음 날 감이 한 박스 도착했다. 아직 연시로 숙성이 되지 않은 청도반시가 무척 많이 들어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남자친구 만날 때에 가지고 가야 하는데! 며칠 전에 사뒀으면 엄마가 덜 달다고 했던 그 연시가 며칠간 더 익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연시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서는 내게, 엄마는 그때 그 연시는 덜 다니까 다른 과일가게나 아울렛에 가서 사오라는 말을 남겼다.

"엄마, 그게 그렇게 맛이 없었어?!"


내가 자주 이용하는 그 과일가게를 지나치고, 다른 과일가게는 몸살 기운이 다 낫지 않은 내가 가기엔 너무 멀고, 그나마 가까운 아울렛의 마트를 가서 연시를 찾았다. 열한 개에 팔천 원, 솔직히 싼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걸 사서 남자친구가 맛있는 걸 먹는 게 나도 좋으니까. 여섯 개짜리 한 팩은 남자친구에게 주고, 다섯 개짜리 한 팩은 엄마를 드렸는데 엄마가 '역~시 맛있다'며 너무 좋아하신다. 엄마 입맛은 참 고급지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홍시의 맛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인 걸까? 그렇게 좋아하는 과일인 것을.


새언니가 보내준 감은 오늘도 베란다에서 익어가며 맛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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