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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쿰쿰 Feb 07. 2022

시험관에서 계류유산까지-2

나 안 괜찮아

7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사용한 임테기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매직아이로 농락당한 것도 두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잘 보였던 매직아이 때는 병원에 달려가서 피검을 했으나 수치가 0점대로 나온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임테기는 아마 불량이었겠지.


그런 내가 처음으로 매직아이가 아닌 육안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두 줄을 보았을 때, 내 눈을 의심했다..라는 상투적인 표현 보다는-안도감이 들었다. 아, 나도 이런 두 줄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매일매일 임테기의 노예가 되어 살아갔지만, 하루하루 진해지는 임테기의 노예는 상당히 할 만했다. 소위 말하는 역전(대조선보다 시약선이 진해지는 것)이라는 것도 보고. 역전을 본 이후에는 임테기를 하지 않았다.


아기집 확인 이후로는 임신확인증이 나오고 공식 임산부가 되었다. 복무를 바꿔야 했기에 직장에도 알렸고, 양가 부모님에게도 바로 임밍아웃했다. 친한 사람들에게도 바로 알렸다. 사실 아기집 보기 전부터 알리고 싶었고, 그 근질근질한 입을 참느라 나나 남편이나 꽤나 고생했었던 것이다.




시험관 아기로 임신이 된 경우, 난임병원에서 대략 10주정도까지 지켜본 후 일반 분만병원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자연임신의 경우는 임신 확인 이후 2주~1달 꼴로 병원에 가서 초음파 확인을 하지만, 난임병원은 1주일에 한번 가서 확인한다. 아마도 초기 유산 확률이 자연임신보다 높아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 병원에 가서 내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를 관찰했다. 첫 주는 아기집, 두번째 주는 난황 및 심장소리 확인, 세번째 주는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과 심장 뛰는 반짝임까지 관찰했다.


임신일기도 적기 시작했다. 내 자궁 속에서 커가는 아기는 아직 인간의 모습도 완전히 갖추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일기의 끝은 항상 '사랑해 내 새꾸'였다.


들어가고 싶은 조리원이 빨리 예약이 찬다는 것을 알고 조리원도 알아보았다. 나와 출산예정일이 비슷한 날짜는 이미 방이 다 찬 상태였다. 사실 7주차면 너무 일렀지만, 그 말을 듣고 조바심에 조리원에 예약금도 걸었다.


네 번째로 아기를 만나러 가기로 한 월요일 전날, 활동하던 9월 예정일 엄마들이 모인 단톡방에 '저 내일 우리 ㅇㅇ이 보러 가요. 너무 설레요'라고 적었다. 대부분이 자연임신인 그 곳의 엄마들은 2주에 한번 꼴로 초음파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를 매우 부러워했다.


그리고 다음날, 순조롭게 도착한 병원에서 순조롭게 들어간 진료실. 나는 그렇게 우리 아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돌연 심장을 멈추고 사망하는 것을 '계류유산'이라고 한다. 원인은 대부분이 염색체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정된 세포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염색체에 이상이 생기면 대부분의 경우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 담당 주치의 선생님은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강조하셨다. '절대 엄마 잘못이 아니다.'라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상황에서 별다른 희망이 남아있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한번 더 보았다. 역시나 사망 판정. 그 의사 선생님도 이 말을 강조하셨다. '엄마 잘못이 아니다'라고.


이 모든 분들이 나를 위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건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내 인생에서 처음 겪는 종류의 슬픔이었다.


다음날 바로 소파술을 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원인 모를 팔 통증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거실로 나와 빈백에 드러누웠다. 밤은 깊고 고요했고, 내 의식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고통은 아기를 지켜내지 못한 내가 받는 벌인가. 우리 아기가 나를 원망하며 남기고 간 흔적인가.


그렇게 감각을 세워 통증을 하나하나 세포에 새기는 느낌으로 음미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으로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랬다, 의사선생님들의 판에 박힌 위로는 나에게 와닿지 못했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아기를 지켜내지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속에서 생겨나서 내 속에서 사그러진 생명. 누구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이 터져나왔다. 지극히 약해진 눈물샘은 유산 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에 의해 자극되어도 삽시간에 눈물을 방출시켰다.


슬프거나 아픈 일을 주변에 잘 알리고 위로받곤 했던 나인데, 이 일은 이상하게 주변에 내 슬픔을 알리기가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괜찮냐고 연락해 주었고, 그 중에 만난 사람도 있지만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사람을 만날 때에는 이야기하고 웃다 보면 잠시 그 슬픔을 잊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즐겁게 웃다 들어온 집은 공허했고, 홀로 있으면 다시 터져 나오는 눈물은 그리 이상한 모양새도 아니었다. 그래, 이게 당연한 거겠지.


아기를 떠나보낸 지 일주일 쯤 되던 날, 마지막 임신일기를 적고 아기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상자 안에 넣었다. 일기를 적으면서 한바탕 통곡을 하고 났더니 한 매듭이 갈무리 된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슬픔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그렇게 이주일이 지난 지금, 눈물의 빈도는 현저히 줄었고, 그 자리에는 우울이 남았다. 설 직전에 유산 통보를 받았고, 이런 나를 긍휼이 여긴 양가 어른들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명절 자유를 주셨다. 신나게 호캉스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그 와중에 임신 기간에 못 먹어서 벼르다가 먹은 초밥은 어찌나 맛있던지.


그런데도 홀로 있을 때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우울은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평소 우울함을 못 숨기는게 문제인 나였는데, 왜이리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가 싫은건지. 그래서 이 곳에 적어본다.


다음 아기를 위해 다시 몸을 만들어야 하기에 운동도 시작했고, 오랫만에 스스로 운전해서 장도 보고 왔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쌓이면 이 우울을 해소할 수 있겠지.




이제 나의 첫 아기를 가슴에 묻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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