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운, 월간 권태, 2020
보류됨의 즐거움에 대해서
무언가를 보류하는 것을 좋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 성질이 급한 아이였고 빨리 답을 받기를 원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알 때 까지 문제에 매달렸고, 온갖 책을 찾아가면서 답을 찾았다. 다음에 해야지, 라는 말은 거의 한 적이 없었다. 시작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끝을 좋아하고, 문제를 좋아하는 만큼 답을 좋아했던 것 같다. 결론, 정해져 있는 것, 결말, 그런 것들에 매달리고, 궁금해 하고, 확실히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 삶의 크고 작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 네게 이 보류되어 있는 시간이 썩 좋지 않니, 하고 건넸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넌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그 보류되어 있는 시간은 정체모를 널 두고 절절매던 시간이었다. 이런 식의, 네가 친구네 아니네 하는 고민의 시간은 사실 썩 좋지 않았다.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 혹은 컵에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 하는 말장난 같이 어중간한 상태는 머리를 붕붕 뜨게 했다. 한 순간도 편안하지 않았다, 라고 말해도 거짓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한 이유는 뭐였을까. 그 순간에 너에게 건넬 그럴싸한 말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근사한 말로 네 환심을 사서, 나의 결론이 될 네 대답을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려는 얕은 수였을지도 모르고. 난 보류되는 것의 즐거움을 전혀 몰랐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이상하게 좋았다. 너를 만났기 때문에 구태여 보류해 둔 불편함은 왜 좋았는지 난 그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그 시간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그 시간과는 아주 다른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그 때의 문장들이 자꾸 떠올라서, 왜 그 어중간하고 불편했던 말들이 그렇게 의미가 있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실마리는 과거에 네가 이미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하고 내가 말했을 때 네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 하며 웃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는 무슨 말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하니,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네 말이 옳았다. 진심이었을지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였을지 모를 그 말은 결론적으로는 옳은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결말을 위해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어차피 우리 모두의 결론은 죽음으로 같은 셈이다. 결론이 지어진 이상 우리는 모두 결론을 앞두고 보류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그 생이라는 보류된 시간 안에서 작게 이런저런 것들에 묶여 보류되어 있는 게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자신의 파괴라는 정해진 결말을 알면서도 기획되고 생산되고 진화해 나가는 상품들 같은 운명을 지고 산다. 어쩌면 넌 그런 수많은 보류됨에 엮인 일상이 피곤했기 때문에 우리의 결말이 죽음으로 이미 정해졌다는 것에서 긍정성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보류된 시간을 불쾌히 견디던 내가 삶의 모든 질문을 풀지 못해 안달했듯이.
그래서 우습게도 난 내가 한 거짓말을 참말로 증명해 버렸다. 그 보류되어 있었던 시간은 그 시간이 다 끝나버린 후에야 썩 좋았다, 하는 결론을 맺었으니까. 우리는 죽음으로 결론 지어진, 태생부터 위태로운 삶 속에서 붙잡을 존재가 늘 필요하다. 계속 곱씹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무의미한 자기파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는다는 증거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너를 만나 보류된 시간은 썩 좋았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묶여 있을 보류의 시간 속에서 너를 만난 시간은 많이 슬퍼하고 또 그 만큼 기뻐하고 모든 순간 생각 속에서 떠다니면서, 이상할 만큼 행복했던 시간이었으니까. 네가 함께 있기에 참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너와 함께한 보류의 시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 시간 붙잡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 있었던 시간이었다.
전여운 |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제학도입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깨달음들을 기록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떠오른 이야기들을 씁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생각들과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그 글이 독자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