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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2. 2024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내가 네가 될 수 있다면] 묘

어떤 우주에서 나는 아주아주 늙은 개다.

주둥이가 길고 해가 닿는 부분만 노릇한, 흰 털을 가진 아주 아주 늙은 할아버지 개다. 쇠 목줄을  앞발을 그러모아 턱을 기대고 긴 숨을 내쉰다. 들어오는 숨에는 먼지와 개 냄새가 섞여오고 눈에 닿는 햇빛은 따갑지만, 그 모든 것이 당연해 어떤 자극도 없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뛰어나가는 어린 인간을 지켜보며 꼬리로 땅바닥을 몇 번 쓸어 먼지를 일으키다가 그만두었다.


(다음 글을 떠올리는 동안 쇠 목줄을 찰그랑거리고 긴 숨을 내쉬고 들숨에 개 냄새가 들어옴을 느끼고 꼬리로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순서에 맞추어 반복하다 잠에 들기.)


-

시계를 뒤로 돌려 초등학교 저학년 미술 시간으로 돌아가자. 아, 각자의 경험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관념적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돌아가 보자는 이야기다. 우리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크레파스를 두세 개씩 집어 들고 종이에 문대기 시작한다. 주제는 꿈이다. 교사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손을 닦아주고 그림에 대해 질문한다. 빨강 파랑 초록 검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의사, 화가, 가수, 베이커 등 각자 다른 무언가가 되어간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종칠 시간이 다가오면 우리의 크레파스 혼합체는 교실 뒤편의 초록색 게시판에 올라붙는다. 우리는 땡땡한 볼로 만족스러움을 표현하고 (몇몇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울상이지만) 교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 수업의 목표인 어떤 대사를 읊는다.

“그래요! 우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어린이들이에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내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말을 너무 믿어버렸던 걸까? 나는 뭘 시키던지 중간 이상을 해내고, 그렇기에 모든 것에 흥미가 넘치는 청소년기를 보내더니 정말 뭐든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부럽다에서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배고프겠다로 바뀌는 것은 5년도 채 걸리지 않았고, 누군가 진로에 관해 물으면 나는 수행하고 싶은 어떤 상태에 대한 말만 줄줄 늘어놨다. 그렇지만 그것은 회피가 아니었고 정말로 그러고 싶은 것이었는데, 영화를 찍고 싶지만, 영화감독만 되고 싶지는 않고 미술을 하고 싶지만 미술 작가만 되고 싶지는 않았고  소설을 쓰고 싶지만, 소설가만 되고 싶지는 않았음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나조차도 이런 삶이 가능한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입시를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제일 많이 들은 말은 하나만 해 하나만! 이었다. 뭐든지 하나 진득하게 판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 말을 귀에 딱지 앉도록 들어가며 나의 하나가 무엇인지, 우선되어야 할 하나는 대체 어떤 것인지를 울면서 찾는 동안 그제서야 어렸을 때 들었던 뭐든지 될 수 있음의 진짜 뜻을 이해했다. 뭐든지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가 아닌 그 뭐든지 중에 하나를 골라잡아 일관되게 경력을 쌓아두라는 말이었다. 충격과 공포… 미디어에서 하고 싶은 게 없는 청년들의 현실에 대해 대서특필하는 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괴롭다길래 나는 내가 그런 방식의 괴로움과는 담쌓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너무 많은 가능성이 앞에 있어 무언가 되기가 겁날때마다 나도 모르는 새 주어진 명을 다 살아두고, 몇십 년의 삶에 있었던 일들을 닳도록 회상하길 바랐다. 적절한 순간마다 ‘어 그때는 조금 좋았었던 것 같기도 해.’ 라던지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 라던가 ‘그땐 정말 좋았는데!’ 혹은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아주아주 늙은 개가 되는 꿈을 꾸었나 보다.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떨던 밤이었기에 아주아주 늙은 개가 되는 꿈을 꾸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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