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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2. 2024

멀리, 날아다니고 있을

[내가 네가 될 수 있다면] 서로

어떤 우주에서 나는 멀리뛰기 선수다. 바람을 가르며 훨훨 나는, 멀리뛰기 선수다. 그 ‘우주’가 어쩌다가 생겨났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모든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교내 체육대회가 있던 날에 시작되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운동장은 온통 소란스러운 열기로 가득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이 운동장 구석에 있던 모래 씨름장에 모였다. 씨름장은 아이들의 팔딱거리는 체온에 서서히 달아올랐다. 체육 선생님은 씨름장에서 50m 즈음 떨어진 곳에 석회가루로 출발선을 긋기 시작하셨다.


내 눈은 파란색 라인기가 지나간 자리에 가지런히 그려지는 하얀 선을 부지런히 따라간다. “5반 여자 선수 나오세요.” 나는 조금 흐트러진 하얀 선 앞에 선다. 발끝을 선에 닿을락 말락 하게 맞춘다.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이고, 주먹을 느슨하게 쥔다. 심장 박동 소리를 비집고 들리는 반 아이들의 함성이 점점 커진다.


삐이이이이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발을 힘차게 내딛는다. 점점 속도가 붙는다. 숨이 빠르게 차오른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턱을 약간 든다. 볼살이 정신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감각만이 또렷하다. 씨름장을 두른 까만 타이어가 눈에 어른거린다. 지금이다! 내 몸의 떨림을 발 끝에 빨아당김과 동시에 세차게 떨쳐낸다. 멀리 날아가야 해. 최대한 멀리. 양 팔과 다리를 앞으로 쭈욱 뻗는다. 엉덩이가 두툼한 모래에 박힌다. 귀를 때리던 바람 소리가 멎는다. 씨름장을 둘러싼 열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느낀다. 어떤 목소리가 뒤이어 정적을 뚫는다. 


2미터 70! 


1등이었다. 학교 대표로 나간 시대회에서도. 곧바로 도대회에 나가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을 떠올리면 빨갛고 뜨거운 트랙이 어른거린다. 뒤이어 떠오르는, 헥헥거리며 달리고 있는 나.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달리기 훈련을 해치우고 코치 선생님과 함께 운동장 구석에 있는 멀리뛰기 연습장에 간다. 처음에 할 일은 내 보폭을 재며 뛴 뒤 출발선을 표시하는 것. 능숙한 손놀림으로 형광색 콘을 출발 지점에 가져다 놓고 그 옆에 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이윽고 호루라기 소리를 상상하며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프, 점프, 점프. 멀리 나가기 위해서는 힘차게 도약을 해야 했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숨이 막힐 때까지 뛰어야 했다. 나는 내 어린 숨을 야멸차게 막아가며 점점 더 멀리 뛸 수 있게 되었다. 145cm짜리였던 나는 3m 80cm라는 거리를 날아다녔다. 그 당시 엄마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셨다고 한다. 도대회에서도 상을 받으면 쭉 육상을 시켜야 할까, 하고.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나에게는 최대한 멀리, 방금 전보다 더 멀리 뛰는 것만이 중요했으니까. 나는 단지 기록이 좋게 나왔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려 애썼다. 훈련하고 집에 와서도 머릿속으로 뛰는 것을 복기하고는 했다. 다다다다다다 타앗      툭. 다다다다 ….


정말 온 힘을 다해서 뛰었는데. 도약하고 공중에 떠있을 때 무릎에 입술을 찧을 정도로  

몸을 잘 접었단 말이야. 느낌이 좋았다고. 근데 왜.     왜.    


엄마와 함께 도대회 경기장을 나오면서 찔찔 짰다.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짰다.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날아올랐던 순간을 떠올린다. 온몸의 근육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풀어졌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모래에 박혔다. 모래는 언제나 그랬듯 두툼했다. 그날 따라 더 부드러웠던 것 같기도.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였다. 


도대회 경기에서 내가 얼마 날지 못하고 모래에 떨어진 이유를 이제는 안다. 날개를 꺾은 채로 날았으니, 당연하지. 날개 없이 난 것은 그때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부끄러웠다. 경기 대기실에서 나보다 머리통이 하나씩 더 큰 또래 선수들을 보고 - 그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강한 날개를 지녔음을 보고 - 나는 내 날개를 슬며시 꺾어 접었다. 그 손놀림이 얼마나 능숙했던지,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내 날개가 꺾였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작고 초라한) 날개가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망각의 순간 우주는 비로소 - 작은 점에서 거대한 면으로 - 팽창하기 시작했다. 뒷이야기는 나도 잘 모른다. 팽팽히 커져가고 있을 그 우주에서는 내가 아직도 멀리, 날아다니고 있을 것을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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