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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글방 Jan 02. 2024

코끼리 이호수

[내가 네가 될 수 있다면] 지수


어떤 우주에서 나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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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종종 다른 우주의 나에게 찾아가곤 했다. 용사 이호수, 연예인 이호수, 견주 이호수, 코끼리 이호수. 그냥 이호수.

다른 우주를 사랑하던 아이는 한국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 아이는 학교 수업을 듣는다. 우주에는 관심없는 아이들, 나를 재촉하는 어른들, 그리고 1, 2, 3. 그 아이는 시간이 없다. 이 우주는 그들은 뒷모습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곱을 해야한다. 그들과 마주하기 위해서 그들의 곱을 해야한다. 우주에 가고싶나? 아니, 시간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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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종종 다른 사람의 모습을 따라하곤 했다. 용사 이호수를, 연예인 이호수를, 견주 이호수를 흉내내며. 나와 “꽤 괜찮은 나”의 거리를 좁혔다. 머리가 하나 즈음 더 자라고, 모방은 대상을 바꾸었다. 오랫동안 거부하고 저항했지만 결국은 나도 모르게 ‘고도’가 ‘온도’ 위로 올라섰다. 따뜻하기보다는 위에 있기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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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이제 타인의 우주를 훔쳐본다. 내 우주는 작고 초라해. 초신성마냥 발산하던 에너지를 금방 소진하고 차갑게 식을 것만 같다. 분명 내 우주가 더 빛났는데.

담을 쌓기 시작했다. 자꾸만 타인의 우주에 눈을 돌리는 내가 싫어서, 내 우주만 남겨두었다. 처음에는 꽤 아늑했다. 조용했다. 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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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우주 밖으로 나갈 생각이 있냐고요? 글쎄요. 지금은 딱히. 솔직히 말하면 이 안에서 산지 너무 오래돼서 나가기 두렵네요. 아직까지는 부족한 것도 없는 것 같고요. 가끔 다른 우주가 가까이 지나가는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뭔가를 시도하는 것 같기는 하던데… 이 안에서는 다양한 것들을 해요. 그림도 그리고요. 시도 가끔 쓰고요.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우크렐레도 잡아봤어요. 생각보다 꽤 어렵더라고요. 외롭지는 않냐고요? 안 외롭다고 하면 거짓말이고.ㅎ. 근데 뭐, 역시 다른 우주는 아직 좀 무서워서요. 사실 이렇게 있으면 남들 평가를 받을 일이 없잖아요. 그 사람들은 내 우주를 전혀 모르니까. 그냥 저기 뭔가가 있구나~ 싶겠죠. 근데 이거 열면 진짜 알몸으로 마주하는 거잖아요. 맨정신으로는 할 짓이 못 될 것 같은데요? ㅎㅎㅎ. 아 뭐 언젠가 나가기는 하겠죠 할건데.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은 안 나가고 싶어요. 말했다시피 저는 이정도가 아직 좋아요. 딱 적당해요. 가끔 오는 외로움 덕분에 작업을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아 이제 가시려고요? 반가웠어요, 사람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서 말은 제대로 했나 모르겠네. 아유, 아니에요. 별거 없는 이야기였는데 들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네, 다음에 또 봬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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