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잃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작지만 묵묵한 응원
《비긴 어게인》이 'Are we all lost stars'라 노래하듯 우리의 다음 요리 《찬실이는 복도 많지》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끊임없이 노래한다. 평생 하나의 꿈만을 좇을 것 같던 당신도 한순간에 꿈을 놓칠 수 있다. 이번 영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덤덤하게 응원을 전하는 요리가 될 것이다. 요리를 한 입 베어 물고 담백함을 느끼며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을 채우자.
2020년 백상 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여자 신인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가 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공 '찬실' 역을 맡은 '강말금' 배우이다. 독특한 마스크와 깊은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은 그녀는 찬실과 싱크로율 100%의 연기를 선보이며 영화를 빛냈다. 저예산 영화였던 이번 요리는 '찬실'의 연기와 더불어 뛰어난 작품성 그 자체로 빛났다.
찬실은 잘 나가는 영화 PD였다. 소위 말하는 '프로듀서'였던 셈이다. 주변에서 그녀에게 '방송 PD도 아니고, 무슨 영화 PD가 있어?' 하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늘 같았다. 감독의 뒤에서 작품이 완성되게 돕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그렇게 영화 PD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오던 찬실은 커다란 벽에 부딪힌다.
믿고 따르던 감독님이 술자리에서 찬실의 곁을 떠난 것이다. 영화에만 몸 담고 평생을 살겠다 다짐한 그녀는 감독님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감독님은 찬실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이었고 그녀의 영화 인생을 밝혀준 등불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찬실은 길을 잃고 방황하며 어둠을 헤맸다. 그녀는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를 뚝 끊고 산속에 인적이 드문 하숙집으로 이사를 간다.
찬실이 하숙집을 향해 대야를 이고 언덕을 오르는 장면은 다소 억척스럽다. 굳이 대야를 이고 지면서 산길을 오른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자 애쓰는 것이 이 장면을 통해 화면 밖으로 전해진다. 이미 약해진 마음을 강하게 붙잡고자 억지로 강한 척을 하는 찬실이 후배들의 앞에서 더 빠른 걸음으로 짐을 나르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숙집에 들어온 찬실은 급기야 헛것을 본다. 오래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배우 '장국영'의 환영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생경하게 느껴져야 할 설정이 오히려 이질적인 반가움으로 느껴진다. 위화감이 들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어색하지가 않다. 찬실이 장국영을 보는 태도 때문일까. 유령을 보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장국영을 친구처럼 대한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를 보듯 그와 서슴없이 대화하고 혼자 운동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관객들에게도 점차 '장국영' 캐릭터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가 갑자기 안 보이면 어디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어느 순간 찬실처럼 그를 챙기고 있다. 영화에서 그는 찬실이 힘들 때 나타나고 그녀가 심적인 부담을 하나씩 극복할 때에는 사라진다. 그래서 그가 보인다면 찬실이 마음의 짐을 지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쓰인 장국영은 입는 옷에 따라서도 찬실의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나시와 속옷 하의만 입고 있는 그는 찬실의 마음이 헐벗은 것처럼 공허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옷을 잘 갖추어 입은 그는 그녀가 새로운 결심을 해서 마음을 굳건히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찬실은 영화인으로 살아갈 기로에서 오랫동안 방황하기에 장국영 캐릭터가 옷을 차려입은 장면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마무리 부분에서 그가 드디어 겉옷을 걸치고 나타났다는 것은 찬실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장국영의 환상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도 영화와 관련돼 있다. 배우 '소피, ' 그리고 찬실이 좋아하는 '김영.' 먼저 소피는 겉으로 보기에 철이 들지 않은 배우이다. 이전에 같이 영화를 작업한 친분으로 찬실은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을 한다. 찬실은 좋아했던 영화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는데 소피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닌다. 즉흥적이고 계획이 없는 소피는 찬실에게도 늘 낯선 존재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나름의 걱정이 있었다. 밝은 웃음과 헐랭이 같은 그녀의 모습 뒤에는 배우로서의 고충이 숨어 있었다. 그녀가 성심성의껏 공들여 찍은 영화인데 제작팀과 손발이 안 맞았는지 그녀의 분량이 확 줄었던 것이다. 모처럼 영화를 찍으며 기뻐했던 소피는 속상한 마음에 술을 진탕 마시고 찬실과 동료들 앞에서 뻗는다. 그 모습을 본 찬실은 소피도 걱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소피는 늘 자신의 이름이 '걱정이 사라진다'는 뜻이라고 말해왔다. 고민을 피하는 것 같던 그녀도 영화인으로서의 삶에서 힘듦을 안고 있었다.
그런 소피와 찬실을 모두 지켜본 김영. 본업은 단편영화 감독이었는데 돈이 되지 않아 소피의 프랑스어 강사를 하고 있었다. 가정교사였던 김영은 소피의 집에서 일하는 찬실과 우연히 마주친다.
찬실도 김영도 저예산 영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인상적인 설정이다. 영화에 대한 찬실의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둘의 식사 자리이다. 이전까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녀는 김영의 말을 듣고 화를 낸다. 그가 찬실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작품이다'라고 비평한 것이다. 이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인물관계가 다 변하는데 그게 어떻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작품이 찬실이 사랑하는 영화였다. 겉보기엔 물 흐르듯 잔잔하지만 흘러가는 개울처럼 자연스러운 변화를 담은 작품. 개울에도 바람이 불면 물결이 흔들리고 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물수제비를 뜨면 음계처럼 파동도 생긴다. 그렇게 인생사가 모두 일들의 연속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영화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작품이 작건 크건, 흘러가는 인생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면 그녀가 영화를 만들 가치는 충분했다.
결국 찬실은 자신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듯이, 그녀는 장국영, 소피, 김영과 이야기를 나누며 살면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라는 확신을 가진다.
찬실이 작품 내내 하는 말이 있다. '저 영화 계속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뭘까요?' 자연스러운 사투리로 장국영에게 묻는 그녀의 말은 작품을 보는 우리의 마음에도 울린다. 살다 보면 자신이 좋아한다고 믿었던 일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길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영화감독뿐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을 법한 질문이다.
그런데도 찬실은 옷을 입은 장국영을 만나고 영화를 놓지 않는다. 어렵게 포기의 문턱을 넘은 찬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이어가기 어려운 순간이 와도 그 꿈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이라면 절대 놓지 말라고. 그렇게 찬실은 감독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작품을 만들고 독립적인 영화인으로 성장한다. 마치 '데미안'에서 주인공이 알을 깨고 나오듯이 말이다.
그러니 '꿈'에 있어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찬실처럼 날개를 접지 말자. 아직 우리는 혼자 나는 것이 두려운 아기새지만 한 번 날개를 펼치면 창공을 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