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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Jun 03. 2021

자존감을 찾아서

자존감은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을 줄인 말이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을 자존감이라고 부른다. 자존감을 말할 때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다, 높다’라고 표현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해결해야 하는 삶의 문제 앞에서 자신감마저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다. 다른 사람이 어려워하는 도전이나 장애도 쉽게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삶이 귀하고 소중하지만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높은 것이 더 유리해 보인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3억 분의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야한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인데 그보다 몇 배나 더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소중한 생명인데 왜 스스로를 가치 있고 존중하는 마음인 자존감은 사람마다 다를까? 때로는 낮은 자존감으로 자신의 귀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법을 몰라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과 자존감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고 의문이 들 것이다.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의 딸아이에게 있었던 일을 듣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어라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가 하루는 엉엉 울면서 집에 왔다고 했다. 친구가 왜 우냐고 물어보니 같은 반 남자 애가 자기한테 ‘바보'라고 놀렸다고 했다. 보통 엄마 같으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신의 딸한테 ‘바보'라고 놀린 그 녀석을 혼쭐 내주고 싶었을 것이다. 딸을 앞장 세우고 당장 그 녀석을 찾아 나설지도 모르겠다. ‘어디 내 딸을 놀려!’라고 씩씩거리며 남자아이의 부모에게 따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친구는 조금 달랐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아이를 보며 물었다.

“근데 왜 울어?” 

친구는 차분하게 아이에게 물었다.

 “나한테 바보라고 했다니까!”

딸아이는 자신을 달래주지 않고 이상한 질문을 하는 엄마한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방법을 찾다가 이렇게 질문했다.

“연아야, 너는 여자야 남자야?”

뜬금없는 엄마의 질문에 아이는 눈물을 머금은 채 대답 대신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당연히 여자지!" 

하고 신경질 섞인 대답을 했다. 친구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친구가 너한테 남자라고 놀렸어도 울었을까?”

순간, 딸아이는 멈칫했다. 엄마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눈빛으로 아이의 눈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연아는 연아가 바보라고 생각해?”

아이에게 인지 시켜주기 위해 친구가 다시 물었다.

“아니, 나 바보 아닌데.”

어느새 울음을 그친 딸아이가 엄마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래, 연아가 스스로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친구가 바보라고 놀린다고 그 말을 인정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없어.”

아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연아는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친구가 물었다.

“나랑 사이좋게 지내고 재미있게 놀고 놀리지 않는 친구.” 아이가 대답했다.

“그래, 연아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야. 연아도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그럼 이제 그런 친구들하고 놀면 돼.”

환한 표정의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내가 상처 안 받아도 되는 거였네.”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타인의 말은 받아들이지 말 것


솔로몬만큼이나 훌륭한 판결을 낸 친구가 정말이지 대단해 보였다. 나도 절대 생각해내지 못했을 방법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딸아이는 웬만해서는 다른 아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설사 짖굳은 친구들이 놀려도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사실이 아닐 때는 쿨하게 넘기고 사실일 때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나는 자존감은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 모두에게 자존감은 완벽하고 온전하며 순수한 결정체라고 믿는다. 다만 그 순수 결정체가 어린 시절부터 의심 없이 듣고 자란 부정적인 말과 상처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말했을 때, 자신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본인이 판단했을 때 정말 능력이 없다면 능력을 키우기 위해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신의 능력을 상대에게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은 채 ‘그래, 나는 능력 없는 인간이야.’라고 쉽게 믿는 것은 자존감이라는 빛나는 결정체에 먼지 덮인 담요를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먼지 덮인 담요를 자존감에 덮어 씌워 놓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 작가이자 비평가인 폴 부르제는 말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부모는 아이들의 생각을 잘 묻지 않는다. 묻더라도 대게는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정도의 단답형이 대부분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왜'라고 묻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구할 수 있도록 질문하는 법을 알려줄 때 아이들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은 부모님을 이제 와서 원망할 수는 없다. 대신 지금부터 자신에게 질문하면 된다. 어떤 일이나 상황이 닥쳤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감정 너머의 생각에 질문을 던져 보자.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자신에게 물어보자. 다른 이가 무심코 내뱉는 말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묻자. 내면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들은 후에 반응해도 절대 늦지 않다.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자존감에 씌워 둔 무거운 담요를 하나씩 거둬내는 과정이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담요를 하나씩 거 둬 내다 보면 밝게 빛나는 당신의 자존감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은 타인의 말로 높거나 낮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자신의 판단으로 빛나게 밝히는 것임을 깨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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