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노인
병철은 태식이 알려준 위치로 걸어갔다. 장소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고 근처에 도착했을 때, 초가집이 하나 보였다. 태식이가 두 달 전에 석재에게 알려준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석재는 보폭으로만 걸어가다 보니, 이곳 초가집이 아닌 수왕산 기슭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병철은 종이에 붓으로 그려준 위치를 보면서 태식이가 말했던 곳에 맞게 걸어왔다. 초가집에는 대문이 없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나무가 한그루 있었고 거기에는 푯말이 걸려 있었는데, 한자로 '檀園(단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병철은 집에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서 말했다. "혹시 누구 안 계세요?"
// 단원은 조선후기의 풍속 화가인 김홍도의 호이다. 백발노인이 김홍도의 서민적인 작품을 좋아했기에 그의 호를 집 앞 나무에 적어서 걸어놓았던 것이다. 그가 그렸던 작품 속의 인물처럼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병철이 다시 밖으로 나오려고 하던 그때에 방 안에서 조용하게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누구시오?" 병철은 다시 뒤를 돌아서 말했다. "아네, 저 말씀 좀 묻겠는데요...", "두 달 전에 저의 친한 친구가 이곳으로 온 이후에 소식이 끊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기 위해서 뭐라도 찾을 것이 없나 싶어서 이렇게 오게 된 것이고요"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올시다. 두 달 전에 이곳을 찾아올 사람이 없었을 텐데요?", "잘 못 찾아온 듯하군요...", 병철은 다시 말했다. "혹시 두 달 사이에 이곳에 찾아와서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했던 사람은 따로 없었던가요?", 문이 열리더니 지팡이가 보였고 웬 백발의 노인이 말을 한 것이다. "내가 시력을 잃어서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구려...", "그러나 귀는 밝아서 먼 거리에서의 소리는 잘 듣는 편이요"
병철은 말했다. "어르신, 그렇다면 혹시 두 달 전에 이 근처에서 특별한 소리를 들은 적은 없으신지요?"
노인은 대답했다. "글쎄 올 시다. 저녁마다 호랑이와 늑대 소리가 자주 들려서 짐승의 울음소리는 제가 많이 듣고 있구려.", "아. 그런데, 저기 저 산 근처에서 누군가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소. 몇 번을 살려달라고 하는데, 짐승을 만나서 잡혀 먹혔겠지요.", "거기가 짐승이 많아서 왜 놈들이 살이 뜯기고 잡혀 먹히는 곳으로 아주 유명하다오." 병철은 말했다. "아, 그렇군요. 호랑이와 늑대... 아, 무섭네요."
노인은 대답했다. "네, 그 근처에는 절대로 가지 마시오. 그랬다가는 젊은이도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니까..."
병철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문 밖으로 나왔다.
병철은 속으로 생각한 것이다. "석재, 이 불쌍한 친구... 결국 호랑이와 늑대의 밥이 되어서 죽은 겨야? 아이고 이 야속한 세상이구만,...", "그런데 왜 태식이 석재를 이곳에 보내서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던 것인지 그게 궁금하군... 저렇게 연세도 많고 앞도 잘 못 보는 분이 무엇을 석재에게 부탁할 수 있었겠는가..."
도무지 모든 게 이상하게 느꼈던 병철은 체념 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그냥 소득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병철의 뒤를 미행하던 철호는 계속 그를 따라갔다.
이 시각 태식이의 지시를 받고 석재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짐을 꾸려 떠났던 용식은 가장 먼저 석재가 살았던 집으로 가게 되었다. 태식을 찾아왔던 주병철이 말한 그대로 방안에는 옷들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술에 빠져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방 안의 모습이었다.
용식은 집 밖으로 나온 뒤에 곧장 저잣거리로 갔다. 그곳에 들렸을 때에 벽에 붙여 있던 유인물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며칠 전 치안부의 가나하라 경부가 그의 부하들에게 부착하도록 했던 일본 군인의 실종사건에 대한 내용과 포상지급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두 달 전 사라진 석재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단서와 같은 시기에 실종되었던 일본 군인 살해사건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군인과 함께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여성에 대해서 이미 조사가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친위대 건물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앞에 친위대 일본 경찰복을 입은 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고 삼엄한 경비 상태에서는 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오후부터 다음날 저녁시간까지 치안부 건물을 오고 가는 자들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옷차림이 허름한 상태로 들어가고 나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경찰이 아닌 일용직 직원들일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시각에 경기 남부로 이동하고 있던 백호, 석재 일행들은 일본군인들이 모여있는 곳 근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략 10여 명의 일본군은 모두 무기를 갖고 있었다. 말을 타면서 수레를 끌고 오던 백호와 상수는 수레에 누워있던 석재와 남수에게 앞에 일본 병사들이 있다는 신호를 알렸다, 석재는 잘못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백호와 상수가 잘 상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은척하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수레에 같이 타고 오던 춘길과 그의 부하들은 신속히 내려서 바위로 몸을 숨기고 무기를 챙겨서 산 위쪽 방향으로 올라갔다. 혹시라도 모를 일본군과의 격돌을 생각하여 활과 화살을 챙겨서 달려갔다.
그리고...
연재소설 '악보 제작소(제12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