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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들 강변

by 소인

배나들 강변

마른 대기에 땡볕 쏟아지니 정신마저 아뜩하다.
습한 기운까지 끼치면 쪄 죽기 딱 알맞은 날씨다. 잠깐 마당에 서도 후끈 단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연일 폭염주의보다. 시원한 콩물 말아 콩국수 점심 먹고 얼음물 챙겨 집 나섰다. 배나들 강변행이다. 초록으로 덮인 숲은 여름옷으로 성장(盛裝)한 모습. 어디고 초록 일색이다. 가벼운 바람이 아카시나무 우듬지 건드리는데 나무는 쨍한 햇볕 아래 귀찮은 듯 몸 맡기고 아무렇게나 흔들린다. 영혼 없는 허수아비처럼. 오리나무 잎벌레가 지나간 오리나무는 그물처럼 송송 뚫린 이파리 달고 버티는 중이다. 멀리 산록의 부연 실루엣이 파르스름하게 이어졌다. 태백 방향으로 갈수록 봉우리는 가팔라진다. 검은 건 아스팔트요 나머진 온통 초록이다. 본격적인 여름 오기 전 벌써 뜨거우면 한여름은 콩 볶는 철판 같을 거라 생각하니 겁부터 난다. 오늘 누구는 수박밭에 순치는 알바 갔다는데 몸 성했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번 배나들 강변서 피라미 낚시한 후 창고에서 먼지 먹은 낚시가방을 뒤져 계류낚시 채비를 손봤다. 서울 살 때 붕어낚시만 줄기차게 다녔는데 취미도 한때인지 먹고사는 일 겹치니 낚시도 멀어졌다. 강릉 살 적엔 감자 삶아 잉어를 잡거나 항구에서 양미리 골라낸 그물에서 파치를 주워 팔뚝만 한 황어를 잡기도 했으나 회유성 어종인 황어는 횟감으론 급수가 낮은 생선이다. 이래저래 그동안 잡은 물고기만 합쳐도 트럭 가웃은 됨직하니 죽어 붕어로 태어나 바늘 물고 몸부림치고도 남을 일이다. 아무리 감정 없는 생명이지만 혹설에 의하면 플라이낚시로 잡은 산천어를 손으로 만질 때 사람의 체온이 물고기에게는 화상 정도의 고통이라니 캐치 앤 릴리즈(Catch & Release)란 구호는 생태보호보다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즐기기 위한 구실이다. 하긴 낚시의 묘미는 잡아채는 전율에 있으니 당하는 고기 쪽에선 죽을 맛일 거다. 난 민물고기는 잘 먹지 않는다. 놔주거나 이웃에게 주거나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저 하나 즐기자고 물고기에게 못할 저지레만 쌓아온 셈이다.

업보로 따지면 난 필시 구정물에 사는 물고기로 태어나 아가미로 가쁜 숨 삼키며 연명하다 욕심 많은 낚시꾼의 바늘에 걸릴 운명이겠다. 현동 우회도로 지나 오르막길 오른편에 배나들로 내려가는 농로가 있다. 가풀막에 농사짓고 사는 주민이 드나드는 좁은 경사로 따라 내려가면 태백 황지못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상류의 물길이 허연 물살 밀고 아래로 돌아간다. 사행천의 형국인데 그나마 물굽이 중간에서 터널 뚫어 발전을 하니 석포의 아연제련소를 필두로 강물은 인간의 셈속에 휩쓸리는 판이다. 비탈밭 왼켠의 청보리밭이 열흘 사이 누렇게 변했다. 소싯적 고물 장사할 때 오뉴월 불볕 아래 까끌한 보리타작하다 그만 독사에 손가락 물려 죽어 자빠졌으면 좋겠더라는 남도 할매의 지난 설움이 덕지덕지 묻어난 얘기가 떠오른다. 엿가위 치며 이 동네 저 동네 고물 산다고 경운기 몰고 다니던 때가 누르께한 보리밭 물결 너머로 아득하다.

휴가철도 아니고 평일이라 장마 때 큰 물 지면 잠기는 평다리는 고요했다. 건너편 산그늘에 차 한 대만 서 있다. 다리 건너 차 세우고 피라미낚시를 꺼냈다. 떡밥을 개어 통발을 던지고 다리 위에서 낚시를 던진다. 굵직한 갈겨니 떼가 모였다 흩어진다. 지난번보다 물이 훨씬 줄었다. 다리 초입 물살이 센 곳의 수량도 전만 못하다. 투둑! 손가락만 한 피라미가 은빛 비늘을 팔딱이며 달려 나온다. 어망에 돌을 달아 물에 던졌다. 이후론 감감소식이다. 얼굴엔 땀이 육수처럼 흘러내린다. 다리 위에선 물을 만지지 못하니 손바닥이 떡밥투성이다. 통발 근처에 모여든 물고기는 맴돌며 풀린 떡밥 냄새만 맡을 뿐, 통발 좁은 구멍으로 들어갈 생각은 도통 없는 눈치다. 나라도 뻔한 아귀 지옥 같은 그물망은 쳐다보지도 않겠다. 동글한 강돌이 깔린 물 바닥엔 제법 많은 고기떼가 웅성거렸지만 낚시고 통발엔 당최 별무 관심이고 저희들끼리 지느러미 솟구치며 희롱하며 놀기에 바쁘다. 두 마리를 잡고는 급기야 성가신 걸 참고 유리 어항을 꺼냈다.

고무신발로 갈아 신고 첨벙첨벙 물을 건너 여울로 갔다. 큼직한 강돌을 주워 반달 모양의 둑을 만들고 어항을 상류 쪽으로 보게 안착시켰다. 두 곳의 어항 지옥을 설치하고 돌아와 커피를 마신다. 한낮의 작렬하던 햇살은 조금 수굿해진 느낌이다.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수면 위에 잠겨 반사경이 되니 눈이 시리다. 병풍으로 둘러싸인 강변의 풍경은 그림 같다. 물가에 낚시를 던지고 욕심만 다락같으니 고기인들 고개 돌리고 말 터. 하긴 고기 욕심은 접은 지 오래다. 물살에 발 적시며 강변에서 오이지 누르는 데 씀직한 돌 고르며 서성이니 호젓한 게 그만이다. 마른 자갈밭에 듬성하게 자란 풀 속에서 무자치(물뱀)가 나타날라 살피며 어항을 들여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텅 빈 어항이다. 물고기는 어항마저 약빠르게 피하는 것 같다.

두어 시간 놀았으니 돌아가려다 실로 수십 년 만에 사둔 파리낚시는 어떨지 궁금했다. 기어코 차로 돌아가 인조 파리가 줄줄이 달린 파리낚시채비를 들고 왔다. 양쪽에 받침대를 묶고 여울에 설치하는데 포인트는 파리 미끼가 수면에 닿을락 말락 해야 최상급이다. 물속의 고기가 날벌레로 착각하고 뛰어올라 무는 방식이다. 예전에 제천 봉양에서 친구와 소주 댓 병을 끼고 앉아 한 마리 걸리면 떼어와 깻잎에 싸서 안주하던 추억이 있다. 폴짝대며 심심찮케 물어댔는데 오늘은 입질만 툭툭대고 물지 않는다. 사람 그림자에 놀란 물고기들이 다리 기둥에 몰려 있다. 거기만 물 반 고기 반이다. 파리낚시를 두고 강돌을 찾으러 다녔다. 볶은 참깨용 절굿공이로 쓸만한 돌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날이 워낙 뜨거우니 물도 미지근하다. 소수력발전소에서 라디오 소리가 건너온다. 멀리 떨어진 파리낚시에 어신이 왔다. 미끄러질세라 조심하며 허위허위 달려가니 굵직한 피라미 수놈이다. 불거지로 부르는 놈은 지느러미에 울긋불긋 혼인색이 멋지다. 주둥이에서 바늘 빼어 어망에 담는다. 잠시 후 놓아줄 놈이지만. 이후로도 툭툭 입질에 걸렸다가 도망가는 놈 등 보기만 해도 좋았는데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다리 위로 나무 지팡이를 든 촌로가 위태위태 지나간다. 여적 불볕 가시지 않았는데 운동인지 산책인지 가늠이 서질 않는다. 서너 걸음 앞의 허공에 머문 노인의 시선이 무표정이다. 보얀 흙먼지 일으키며 비탈길 내려온 트럭이 민박집으로 들어간다. 언덕길에서 강 아래의 물굽이에는 민가라곤 민박집뿐이라 오가는 주민은 농부 외엔 없어 고즈넉하다. 민박집 내외가 호스를 당겨 감자밭에 물을 준다. 알이 들 참엔 물기가 적기의 영양소다. 하지감자 캘 날도 머지않았는데 감자꽃이 드문 걸 보니 가뭄을 겪은 모양이다. 파리낚시를 걷어 물 건넜다.

오후의 태양이 강물을 팔팔 끓이기라도 할 듯이 눈부시게 빛난다. 직벽으로 가파른 솔숲이 청청하게 뿜어내는 냄새가 바람에 섞여 온다. 찔레꽃 지고 무성한 가시 줄기가 길까지 내려왔다. 강은 예전의 강이지만 물길의 입장 헤아리면 상처투성이란 생각이다. 농사와 산업, 오염된 생활쓰레기는 큰 물 지면 아래로 쓸려내려가 강과 섞인다. 야영객이 먹다 버린 쓰레기는 돌틈이나 풀 속에서 썩어간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납덩이와 바늘을 물에 빠뜨리고 물고기의 몸에 박았나. 그것들이 살아 즐기는 대상이라고 하기엔 인간의 습속이란 교활하고 오만하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개념화했던 산업 시대 이후로 생태는 무너져 갔다. 노동이 소외되는 4차 산업 이후를 예견하는 미래학자들의 말속엔 지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서서히 자멸의 길로 빠질 거라는 절망적인 주문도 들어 있다. 과학을 신앙처럼 숭배한 문명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단다. 무소불위의 과학은 전쟁과 학살을 되풀이했으니. 난 생태주의자도 아니고 박애주의자도 못 된다. 눈앞의 유불리를 따지는 현실주의자보다 근원적인 입장에서 현실을 보고자 할 뿐. 강도 온전치 못한 몸으로 혈맥을 뒤틀며 산하를 거쳐 흐른다. 수달래 물봉선화 지천인 강을 지키지 못하면 냄새나는 오욕의 물길을 견뎌야 한다. 뭍과 강의 생명이 병들면 그것의 상위에서 마구 풀어헤쳤던 인간의 문명도 함께 병든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건강한 산하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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