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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Nov 15. 2022

잡설

杂说(25)①


책 읽기에 대한 얘기는 차고 넘친다. 얼마나 많은 양의 책을 읽어야 삶을 통과할 수 있는지 정답은 없다. 책을 읽지 않고 풍성하게 산 사람은 많다. 인간은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부면에서 본다면 경험과 함께 책은 삶의 길잡이가 된다. 사람이 살면서 달라지는 것처럼 책도 바뀐다. 책의 내용이 바뀌는 게 아니라, 책을 대하는 사람이 바뀐다는 뜻이다. 어떤 책을 삼십 년 전에 읽은 사람과 삼십 년 후의 사람은 당연히 다르다. 경험과 사유의 결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로라면 목석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과거에 읽은 책을 다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책은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내 사고의 지반을 받쳐준 책들이 대개 그러했다. 따라서 생각을 조금씩 허물고 다시 세운다. 흙이 무너진 밭둑에 날아온 풀씨가 새로운 싹을 틔우는 기분이다. 전과 달라진 게 또 있다면 돋보기로 책을 본다는 거다.  


 요즘 '다시 읽기'를 하고 있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에 이어 허먼 멜빌의「모비딕」을 읽는 중이다.  페스트는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에서 벌이는 인간의 사투이고, 모비딕은 흰 고래에게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 선장의 불타는 복수를 그린 해양 소설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곤 잊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페스토와 모비딕을 쓴 작가의 숨은 의도를 깨닫고 아연해졌다. 그만큼 나도 변한 것이다. 페스트와 흰 고래는 단순한 질병과 사납고 잔인하며 영리하기까지 한 대상이 아니었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천지 불인(天地 不仁)의 세계였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라고 했다. 천지와 성인은 만물과 백성을 풀로 만든 강아지로 여긴다는 뜻이다. '불인'은 매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사로움이 없는 '무사(無私)'로 읽어야 한다. 살아오면서 깨달은 건 세계를 포함하여 삶은 살만하다는 것과 살아볼 가치가 없다는 거였다. 유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드는 사유는 페스트와 싸우는 의사 리외의 사고와 행위를 말하는 것 같았다. 「페스트」 의 해설에서 유호식은

 

 '그랑이 쓰고 있는 보잘것없는 문장 하나에 리외와 타루가 깊은 관심을 보인 것처럼 성실성은 타인에 대한 열린 태도를 전제로 한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임을 깨닫는다. 페스트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자신의 터전이며, 그 터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카뮈는 이러한 인식에 "통찰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인간은 이 통찰력 덕분에 개인의 행복을 넘어 타인과 연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며 삶의 의지를 간직할 수 있다.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든 인간이 「페스트」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다.'라고 말한다.


책과 독서에 대한 들을만한 얘기는많다. 발화자가 있는 것, 없는 것도 있다. 두서 없이 옮겨 적는다.


책읽기의 바탕에 있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마음"이다. 앎에 대한 욕망이 생명의 본질이라면 더 많이 읽으려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보다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책은 의미의 흐름들을 포획하는 기계다. 아울러 모든 읽기는 다음 읽기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다.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이다.

-Jorge Luis Borges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


나의 정신은 오랜 공복으로 비어 있고, 그래서 삶이 더욱 남루하게 느껴질 때 더욱더 향기와 침묵으로 채워진 책을 만나고 싶어진다. 내가 책에 몰입하는 것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삶의 세계 속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릿


어떤 책은 다 알기 때문에,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에 따르면 맞는 말이고 삶의 인식의 확장에 따르면 틀린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거나 '사는 데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 '좋은 책'은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

-움베르토 에코


책 읽기의 바탕이 되는 것은 지적인 욕망, 즉 앎에 대한 영원한 갈증이다. 책 읽기는 생명 약동이고, 모든 혁명의 배아(胚芽)였다.


인간의 '더 알고 싶은 욕구'는 원시 생물 이래로 존재해온 '탐색 욕구'의 직계 자손입니다. 그것은 생명체의 생명 활동을 떠받치는 '생의 원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생각하는 독서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타인이 밟았던 생각의 과정을 더듬는 데 지나지 않는다. 글씨 쓰기 연습을 하는 학생이 선생이 연필로 그려준 선을 붓으로 따라가는 것과 비슷하다. 때문에 독서는 사물을 고찰하는 데 필요한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 스스로 사색하는 작업을 중지하고, 독서로 정신의 자리를 옮길 때 우리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이 같은 고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작가가 어떤 사상에 도달하기까지 힘들게 수고했던 운동량을 소화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근면한 사람일수록 조금씩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 항상 탈 것에 의존하면 마침내 걸어다니는 힘을 잃어버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대다수 학자들의 실상이다. 그들은 지나친 다독의 결과 바보가 된 인간들이다. 틈만 있으면 책을 손에 드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정신은 불구가 되었고, 고유한 사색은 폐기처분되었다.


머리 대신 손이 필요한 막노동에 종사하더라도 학자처럼 정신적인 환자는 되지 않는다. 육신의 노동은 우리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용수철에 어떤 물체를 올려놓고 계속 압력을 가하면 마침내 탄력을 잃듯이 정신도 타인의 사상에 의해 항상 억눌리다 보면 결국 탄력을 잃고 만다.


많이 읽을수록 책의 내용은 정신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즉 우리의 정신은 칠판과 같다.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쏟아지는 내용을 저장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해진 양만큼 알맞게 읽은 책은 분명 독자의 것으로 남는다. 음식은 종류가 아니라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양분이 될 수도 있고, 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읽기만 하고, 읽은 내용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부분 잊어버리게 된다. 정신적인 음식물일지라도 보통 음식과 다른 점은 없으며, 섭취한 양 중 50분의 1 정도만 영양분으로 남는다. 나머지는 증발작용 및 호흡과 그밖의 활동을 통해 사라져버린다.


독서의 첫 번째 특징은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 같다는 점이다. 즉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과연 이 길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쇼펜하우어 문장론> 쇼펜하우어


독서 후


다독(多讀)이 중요하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것에 그치면 남는 게 없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자기 과시, 자부심, 지적 허영만 남을 수 있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어떨 땐 수십 장의 발췌문을 쓰기도 하고,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고 감동을 준 대목이나 아름다운 문장 및 자신의 작업에 영감을 주는 부분을 발췌하고 메모를 하는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그 책은 온전히 자신만의 책이 된다.

이러한 독후 활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읽은 책은 자신의 사고와 성찰의 영양분이 되지 못한 채 지식의 창고에 무질서하게 쌓이기만 할 것이다.


책이 죽는다고? 책을 외면할 때 죽는 것은 인간이다.


책은 온 인류의 정신이 저장된 창고와 같다. 책을 뒤적이고 있으면 무언가가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좋은 책들은 잠자고 있던 정신, 무뎌져 있던 감각, 흐릿해져 있던 열정 같은 것을 깨우고 벼리고 밝힌다. 독서가 무언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책에게든 책을 읽는 독자에게든, 그 둘 다에게든 문제가 있다.

내가 읽는 책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킬 때, 깨우고 벼리고 밝힐 때 나는 살고 싶어진다. 불러일으키는 책은 좋은 책이다.

이승우(작가)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을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버티어 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읽으며 나도 모르게 말했다. "독서네!"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것, 우리를 무릎 꿇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책읽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박총


삶에 목적이 있는가.

자연을 품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우주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태양계는 수많은 은하계의 부분이고 우주는 지금도 팽창한다. 추수 끝난 들판에 서리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죽은 들쥐에게 목적이 있는가. 개와 함께 걷고 있는 내가 들쥐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란 건 말라비틀어진 풀이 안다. 생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가 어느날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 세계는 맹목적으로 생성과 사멸을 반복한다. 하물며 인간의 문명이란 역사란 얼마나 무지하며 무의미한 무목적인가.


행복도 삶의 목적이 아니다. 지금 순간을 즐기는 찰라의 감성이 생명을 붙드는 순한 바람이다. 생명을 사랑으로 정의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마는 그렇지 않고는 태어난 존재의 고통을 상쇄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안 읽고는 그대의 자유다. 하지만 자유와 부자유는 앎과 무지만큼 멀고도 가깝다. 구속당하고 지배당하기 싫으면 책을 읽고 삶에 반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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