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둘
12월이다. 이 달에는 지난 일 년 동안 하지 못한 일에 대해 헛헛해하거나, 이미 지나가 버려 속 시원한 일에 대한 미련한 감정, 그 양쪽을 오가는 일을 반복하곤 한다. 한 쪽 발판을 밟으면 저쪽이 신경쓰이고, 또 한쪽 발판을 밟으면 저쪽 때문에 마음이 시린 계절을 어찌할 줄을 모른 채. 그렇다고 내년에는 완벽한 발판을 딛고 그 다음 해를 마무리할 수 있으려나? 아니, 그런 12월은 내 인생에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12월에 대해 논하면서 ‘새해 소망’ 같은 걸 이야기 하지 않는 게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맘 때즈음이 되면, 종이 한쪽을 펴놓고 내년에 하고 싶은 일들, 해야하는 일들을 적는다. 어쩐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내년에 나를 걸어두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억지로 꾸역꾸역. 다시 일 년이라는 시간을 맡아두는 것이 너무 막막하지 않도록, 그걸 바라보는 게 버겁지 않도록, 매듭을 지어두는 것에 불과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크리스마스였다. 친구들과 시내에 모였는데, 시간 되는 아이들이 전부 몰려나온 터라, 친하지 않은 애들도 더러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대학에 붙었고, 적어도, 나와서 부끄러운 얼굴을 하지 않을만한 아이들만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꼭 어른 흉내를 내기라도 하는듯, 스타벅스로 몰려들어 갔는데, 실제로는 시내 어디에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랬다. 우리는 의자 네 개에 여섯 명이 포개 앉고는 뜻뜨미지근한 이야기를 나눴다. 스무 살이 되면 어떻게 살건지, 대학에 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실제 나눈 이야기가 이런 식의 거창한 제목으로 포장될 만큼은 아니었어도,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들 텅 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했던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그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 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나서는 나는 매년 내가 그런 텅 빈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고, 온통 미지의 시간들이 다만 흐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쩐지 두려워져서 다시 종이 한 장을 꺼내고 내년에 하고자 하는 일, 별로 설레지도 않고, 실제로 할 리도 없는 일들의 목록을 빼곡히 적어나가는 것이다. 목록을 닫고, 종이를 덮어둘 때가 되면, 마치 이제부터 그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 잠시나마 배부른 감각을 느껴보려고 애를 쓰다가 다시 파도처럼 밀려오는 허기에 거꾸러지기 일쑤다.
올해는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돌쟁이 아이를 하나 키웠고, 막 다섯 살이 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느라 애를 썼다.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잘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건 너무 사치스러운 일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조차도 건사하기 쉽지 않고, 나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서 돌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두 아이들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 생존에, 그들의 생존까지 더하면, 이 삶은 너무 무거워져서 금방 도망쳐버리고 싶은 무거운 짐이 된다.
아이가 하나였을 때는 그나마 그 아이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아이가 둘이 되면서부터는 그 무엇도, 책임질 수 없는 나약한 나 자신을 보게된다. 그 후로 나는 아이들의 생존은 아이들에게 맡기는 편이다. 내가 쥐고 있던 끈을 풀어 아이들 스스로에게 맡긴다. 네 삶은 네가 인도 해야해. 널 도와줄 수는 있지만, 넌 네가 부여받은 삶을 희미하게나마 걸어가렴. 그러니 부모로써 돈을 많이 벌어야하고, 똑똑해져야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느니, 그런 소리까지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나도 버거운 삶을, 너에게 주어서 미안하다고, 그러니, 그냥 즐거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라고, 그렇게만 말하고자 한다.
아이들에게 12월은 크리스마스가 있는 달이고, 어딜 가든 색색의 전구와 트리가 성대하게 펼쳐진 꿈같은 시간이다. 이 축제가 끝나면 다시 지난한 일년이 찾아올 것이 종종 두려워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왜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지, 거꾸로 돌아가서 어딘가에 고정될 수는 없는 건지. 거울을 보면서 내 텅 빈 얼굴을 보게 된다. 그게 내가 내년을 맞이하는 자세다. 무엇이 침투해서 나를 변화시킬지,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 얼굴. 묘하게 불안한 얼굴, 아니면, 체념한듯한 얼굴.
어떤 날은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여 조금이라도 이 삶의 무게가 덜어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냥 흘러가는 그 무엇도 잡지 않은 채, 텅빈 얼굴이 되어, 그냥 살아있다는 것, 그 현재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삶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서, 가만히 나를, 아이들을, 도닥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