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즉흥연주이다.
무언가를 이토록 기다려본 것은 성인이 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화의 개봉예정일은 원래 작년 여름이었다. 그러다 11월로 연기되고, 크리스마스로 연기되었다. 그러다 마지막 날짜 1월 20일. 드디어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기다리며 분명 이것이 나에게 해줄 말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꼬박 사계절을 보내온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섭도록 진지한 고민을 독처럼 품었었다. 태어나기 전 세상의 행복한 기억을 지녔던 유년시절은 다 지나가고 치열함 하나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 사회에서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해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 그것이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단 하나의 목표였고 나는 딱히 반기를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한번도 진지하게 들여다본적도 없고 누가 나에게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누가 그랬다해도 과연 나같이 순종적인 사람이 사회가 원하는 길 말고 다른 길에 대해 크게 주의를 집중했었을까는 의문이다. 무언가를 미치도록 좋아하고 쫓아본 적이 없는 것이 무언가의 원인이었을까 결과였을까 잘모르겠다. 오히려 나에게 무언가 집중할만한 걸 누가 부여해줬다는게 그때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어쨌든 공부를 열심히 한다. 소위 명문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꿈을 이뤘다. 내 꿈이든 아니든 어쨌든 꿈이라 불릴만한 것을 이뤄냈다. 장장 12년 이상을 달려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야 맞다. 그런데 똑같다. 이곳 역시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다. 무엇인가가 소름이 끼칠정도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고 사회는 나에게 또다른 신기루들을 주입하려 애를 쓰고 있다. 싫다. 죽고 싶다. 이따위 것이 삶이라면 이제 내 손으로 이것들을 끝내고 그만 살고 싶다. 이것이 잠에 들기 전 나의 결론이었다. 마음 어딘가가 뻥 뚫려버린 채로 눈물이 줄줄 나왔다. 심장은 쿵쿵 거리고 눈물은 줄줄 흐르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주로 그러다가 지쳐서 그냥 어느새 잠에 들었다. 내가 조금만 덜 순종적이고 조금만 덜 현실적이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덜 아침형 인간이어서 조금이라도 밤에 체력이 남아돌아서 하는 생각이 더 많아졌더라면 분명 어느 밤엔가 실수로라도 내 방 창문으로 뛰어내렸을지 모른다.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라고 그동안 너무 많이도 배워왔다. 돈과 인기는 목적이 아닌 수단. 아니면 그저 무언가를 이루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무언가이다. 좋다. 그런데 그럼 그 목적이라는 게 대체 뭘까?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 그리고 멋진 대기업 직장인이 되는 것?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물리학자가 되는 것? 제빵사가 되거나 사서가 되는 것? 어쩌면 하늘을 보거나 걷는 것이 자신이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22에게 조는 그런 것 따위는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저 반복적이고 약간은 지치는 당연한 것일 뿐. 그러나 그런 그가 온갖 소동 후에 드디어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적인 데뷔무대를 마쳤을 때 말한다.
so, what happens next?
물 속에서 바다를 찾는 물고기 이야기가 있다. 나 역시 삶 속에서 삶이 시작되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물론 꿈이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없는 것보다 훨씬 낫고 그것을 이룰 수도 있다면 축복받은 삶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해있는 사람들은 몸과 정신의 경계 언저리에서 특별한 상태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 지속되는 것은 삶일 뿐이지 어떤 몰입상태가 아니다. 그것이 끝나면 어떤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어떤 무언가는 없다. 집을 가고 차를 타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런 것들이 또 있을 뿐이다. 사실은 그저 하루하루가 있을 뿐이고 일상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몰입을 놓아주지를 않아서 삶과 유리된 채 방황하게 된다. 만약 꿈 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것이 우리 삶을 또다른 재앙으로 이끄는 것이다. 바로 매일 밤 내가 어떤 절벽 앞에 서게 된 것도 비슷한 이치로 내가 무언가를 제때에 놓아주지 못해서일 것이다.
자기의 꿈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조는 한바탕의 지구소동이 끝난 후 어떻게 22의 지구패스 마지막 빈칸이 채워진 건지 깨닫지 못한다. 대체 22의 스파크는 무엇이었을까? 이제야 겨우 살고 싶어진 22에게 조는 악에 받쳐 퍼부어댄다. '아니야 너는 살고 싶어진게 아냐. 너는 내 몸 속에 있기 전까지 음악을 싫어했잖아. 너는 내가 되어보기 전까진 모든 걸 다 싫어했잖아. 너는 착각하고 있는거야.' 하지만 유 세미나에서 멘토가 하는 일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멘티를 자신의 입장에서 살아보게 만드는 것. 삶을 냄새 맡아보지도, 맛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영혼들에게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 조의 몸을 입고서야 처음 샤워기를 튼 22는 생소한 기쁨을 가지고 소리쳤었다.
This water hurts!
'나는 피아노를 위해 태어났어요. 그니까 저의 피아노 같은게 22한테도 있을 거 아니에요? 22의 스파크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직도 물 속에서 바다를 찾는 물고기처럼 물었던 조 . 나 역시 꼭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 절벽 앞에서 나도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본다. 어떤 열정, 목적, 삶의 의미... 이런걸 전부라 생각하며 참 편하게 살았었구나 싶다. 꼭 되어야 하는 것은 없다. 수의사든 미용사든. 다 괜찮다. 무엇이든 스파크가 될 수 있고 마지막 빈칸은 살 준비가 되면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유 세미나에선 배울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람과 흩날리는 나뭇잎 속에서 이 땅 위를 걷는 것, 피자와 막대사탕을 맛보는 것. 거리의 연주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지하철 속에서 지쳐있는 사람들과 몸을 부딪히기도 하는 것. 심지어 다치는 것조차 great before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몸의 고유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충만하게 채워진 상태.
산다는 것은 즉흥연주이다. 정해진 목표 같은 것, 꼭 이뤄야 하는 꿈, 찾아내야만 하는 의미같은 건 없다. 걷고 싶다면 걷고 냄새 맡고 싶다면 냄새를 맡고 하늘을 보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올리면 된다. 그러다 무언가에도 깊이 몰입해서 육체와 정신의 중간상태에 가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 안된다. 살아가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친구의 가슴 깊이 묻은 꿈에 대해도 물어볼 줄 알고, 꿈에 상처입고 날을 세우는 친구에게도 농담을 건넬 줄 아는 것이 ‘재즈’하는 것일 것이다.
일상에 지쳐있는 지하철 속 사람들. 후덥지근하고, 축축 쳐지고 붐비는 무언가. 매일 똑같이 하루하루 그저 지나가는 것. 우리는 이것을 일상이라 부른다. 산다는 건 어쩌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저 숨쉬고 냄새맡고 걸어가는 하루하루 의미없어 보이는 나의 이 일상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이 일상을 살고싶다. 절벽에서 걸어나와 하루하루를 새것처럼 살고싶다. 나의 헛된 꿈들은 너무나 많은 기다림과 어떤 덧없는 종류의 열정이 필요하다. 그치만 나의 일상은 그저 지금 내 곁에 바로 있다. 다행히 거창한 꿈에 비하면 숨쉬고 바람을 느끼는 것에는 큰 돈도 큰 시간도 들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이 일상 속에서 대양을 찾지 않을 것이다. 이곳이 물이고 이곳이 바다다. 더 이상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쫓으며 내 삶은 언제 시작되나하고 내 삶을 낭비하지 않고 지금부터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이 물 속에서,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나는 한 명의 훌륭한 즉흥연주자로 살아가고 싶다. 세상의 사랑을 받으려 아등대지도 않고 쓸데없이 무언가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나로서 살아가다보면 어느날 이 바람이 나를 어딘가로 인도해놓기도 했을 것이다. 꿈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어느새 이루고 지나왔을지도 모른다. 혹 그렇지 못한다해도 이젠 괜찮다. 그렇게 살다가 언젠간 나에게도 갑자기 올 great beyond, 저 너머의 세계를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허둥대지도 않고 한번쯤 살아본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