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같이 사는 법
어느날 수업에서 소설 읽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소설을 잘 읽으려면 다 읽고 나서 나에게 남는 감정에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억지로 써내야했던 감상문들에 그렇게 표현법이 어떻고 줄거리가 어떻고 일장연설을 했던 이유는 그 소설에서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강의 글을 읽고 나서부터 마음이 이유없이 분주해지고 울렁거렸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부분을 뜻밖에 알게된 기분이었다.
안느라는 인물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반당하고 죽는 것으로 소설에서 퇴장한다. 그녀의 죽음은 사고사로 포장될 수 있겠으나 나는 자살이라 읽었다. 세실은 안느를 잃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껏 단한번도 사랑을 해본적이 없음을. 순간적이고 강렬하기보다 지속적이고 그리운 그 무언가를. 그 이후 그녀는 이따금 깊은 밤이면 솟아오르는 그 무언가를 슬픔이라 이름 붙이고 지극히 사강다운 태도로 기꺼이 그것을 맞아들인다.
한 사람의 생생하고 따뜻했던 육신이 어느새 하얀 가루가 되어 작은 통에 담기는 과정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부터 나의 삶에는 생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다. 누군가 내 삶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흔적인 그 구멍은 가끔씩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하지만 결코 없어지진 않는다. 아마 내가 죽고 나서야 나의 육신과 함께 그 구멍은 사라질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강의 소설을 읽고 나서는 오로지 이 생생한 감정과 느낌밖에는 나는 할말이 없다. 어쩌면 수업에서 배웠던 소설 읽는 방법은 삶에 대한 거대한 비유같기도 하다. 줄거리든 표현법이든 결국 삶의 끝에 남는 감정만이 진짜이지 않을까.
사강이 슬픔에게 건네는 인사는 goodbye가 아닌 nice to meet you. 슬픔이여 안녕, 이제야 우리가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