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사랑을 추구하기
책을 사놓고 또 며칠을 묵히다가 돌연 몇시간만에 읽어치워버린 책이다. 확실히 느낀 건 사강, 이 사람은 글을 참 맛깔나고 쫀득하게 잘쓴다. 이번이 두 작품째인데 앞으로도 이 사람 소설은 실패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은 폴과 로제라는 두 연인이다. 폴이 여자고 로제가 남자다. 이게 헷갈려서 몇 챕터는 헤맸다. 폴과 로제의 권태로운 연애. 그리고 그 사이에 불현듯 끼어든 시몽이라는 남자. 그 셋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약간은 뻔한 스토리다. 그러나 삶의 생기과 활력이 살아 넘치는 소설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종류의 감정이 생생하게 얽히고 설켜 한 편의 뮤지컬을 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약간 사랑지상주의자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 모든 인간의 감정의 근원이자 결말이어서 그렇게 느껴진 걸지도 모른다.
일단의 감상평은.. 어려웠다. 특히나 폴의 심리선에 공감하면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폴이라는 여자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고 가혹하다. 스스로를 어떻게하면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같았다. 로제의 외도를 눈감아주면서까지 권태로운 연애를 이어나갈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나의 근거였는데, 아마 폴은 지나간 10년이라는 세월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던 듯 싶다.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책임감없이 사는 로제의 쓰레기인생도 한숨이 푹푹 나왔다.
그러다 시몽이 끼어들어 둘의 관계가 청산되는 듯 했으나 결말은 결국 둘의 권태로운 연애로의 회귀였다. 약간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왜들 그렇게 사는지. 그런데 어이가 없었지만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강은 이런 걸 참 잘한다. 인간으로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찌질하고 보잘 것 없는, 애써봤자 늘 거기서 거기인 인간의 본질을 너무나 생생하게 잘 그려낸다. 대상물이 너무 적나라해서 탈이지 묘사와 채색 솜씨는 진짜 예술이다.
인물들 중 유일하게 눈뜨고 봐줄만한 인물은 시몽이었다.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이십 오년동안 이 선생에게서 저 선생에게로 옮겨 다니며 줄곧 칭찬이나 꾸중을 받은 것 말고,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젊은 사랑지상주의자, 사강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인물인 시몽은 불현듯 일터에서 상사에게 혼나다가 이런 봉창 두드리는 대사를 친다. '저는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혼내는 상사 가슴만 미어터질 거다. 업무 지적에 사랑타령이라니. 그러나 시몽은 인물들 중 가장 솔직하고 충실한 인물이었다. 사강이 이렇게 살다 갔다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방울이 맺힌 쇼윈도를 통해, 가을의 회한으로 가득 찬 햇살이 돌연한 열기를 품은 채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문학도도 아니고 지극히 현실에 타협해 전공을 선택한 대학생으로서 내가 사랑하는 건 단편 소설보다 장편소설이다. 문장 하나를 음미하고 감상하기보다 드라마가 좋고 서사의 흐름을 더 즐긴다. 그러나 이 사람 소설을 읽으면 이렇게 순간순간 멈추게 된다. 문장이 너무 좋아서 곱씹고 또 곱씹는다. 인물들이 내 곁에 한참을 서있다 갈때까지 음미하게 된다. 번역하기 전에는 또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폴과 시몽의 짧은 데이트중, 모사의 귀재인 시몽이 재판 상황 하나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며 말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가볍게 페이지를 넘겨가던 중 불현듯 양심이 찔렸다. 사랑하지 않으려, 행복하지 않으려 온갖 편법과 체념으로 덕지덕지 나를 숨겨오진 않았었던가. 그런 나에게도 고독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시몽의 단순한 물음에 그녀가 그토록 멈춰섰어야 하는 이유는 폴은 그동안 착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로제를 사랑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 로제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진정 브람스를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자기 너머의 것, 자기가 아닌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울과 공황이 이 시대를 지독히 덮고있다. 너무나 고독하다. 우리는 약과 잠과 슬픔에 취해 현실을 직시할 수가 없어지고 있다. 이 현실이 너무 두렵다. 내 곁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스스로를 포기하고, 우리는 그 빈자리를 도저히 메울수가 없어 그저 끝을 생각할 수 밖에 없어진다. 오늘은 동생과 이런 대화를 했다. 수렵채집 시대 사람들은 공황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겠지.
무심한 동생의 말처럼 이 시대 과도한 복잡성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나는 나를 살리게 할 단순성을 다시 추구해가기로 한다. 단순하게 행복을 추구하고, 약간은 대책없이 인생을 낙관하며, 또 자의식에 심취하지 않은 채 나 너머의 것을 단순하게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