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위대한 이름과 의미
나와 25년 지기 베프인 현주는 내가 고3 되던 해 같은 반 짝꿍이었다.
학기 초 번호를 매기기 위해 복도에 나란히 줄을 서면서도 사실 현주와 나는 서로를 몹시 경계하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비슷한 키를 가진 우리는 앞뒤 번호인 42, 43번이 되었다.
내가 영구와 다른 길, 다른 버스를 타고 다녔던 고1의 시간 동안 내가 몰랐던 영구의 1년을 함께 한 친구, 현주는 영구의 고1 베프였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아는 척도, 친한 척도 하지 않은 채 짝꿍이 되었다.
고2 1학기를 채 마치기 전,
영구는 집으로도 학교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영구의 가출은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꽤나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듣기 거북한 소문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인천 어딘가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는 학생부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구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구는 더 이상 학교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현주와 내가 같은 반이 되면서 서로를 경계했던 이유는 영구였다.
나에게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던 영구,
나는 영구가 현주에게는 솔직했을지에 대해 항상 궁금했었다. 하지만 바로 묻지는 못했다.
현주는 나와는 많이 다른 아이였다.
꽤 좋은 머리를 갖고 있음에도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좋지 않은 머리를 갖고도 공부하려 애썼던 나와는 관심사가 많이 달랐다.
그랬던 현주와 내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어느 날 알게 된 서로의 마음이었다.
한 친구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영구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나는 무교동, 현주는 명동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타지에서 20살이 느끼는 외로움과 서러움은 10분 거리에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꽤 큰 위안이 되어주곤 했다.
첫눈이 오면 첫눈이 온다고, 성과급을 받으면 성과급을 받았다고 제일 먼저 연락해서 기쁨과 안부를 물었던 20살의 현주와 나.
그렇게 우리는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20대의 청춘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몇 년이 흘렀을까?
현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놀라지 말라며, 영구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같이 만나러 가지 않겠냐며.........
현주는 놀라면서도 꽤나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선뜻 영구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통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 망설이는 마음을 읽었던지 현주는 자신이 혼자 만나고 오겠다며 더는 권하지 않았다.
현주를 통해 나는 영구가 희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고 방송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영구는 현주에게만큼은 누구보다 솔직했다.
나에게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존재를 현주는 알고 있었다.
예쁘고 요리도 잘하는 서울 사는 엄마가 한 번도 영구를 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현주에게만큼은 솔직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어떤 방법으로라도 영구에게 솔직할 기회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엄마를 그리워했던 영구에게 새어머니가 생겼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새어머니에게 누구보다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라도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에 나는 참 감사했다.
영구는 희진이가 되었고, 어른도 엄마도 되었다. 그리고 희진이에게는 이제 엄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