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범생이들 모여라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이 있다.
"공부 잘하게 생겼네.", "모범생 스타일이네."
때로는 꽉 막혔다, 고지식하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사실인걸. 누가 봐도 사고 한 번 안 치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착실하게 살아온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 바로 나인걸. 반항아의 간지를 꿈꾸지만 거울 속에는 갈데 없는 모범생이 들어앉아 있는걸.
모범생으로 살아가면 편한 점이 많다.
우선, 사람들의 신뢰가 기본으로 따라온다. 워낙 진실만을 말하게 생겼다 보니 같은 말을 해도 기본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태세다. 사실, 이 점을 이용해서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한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니 여러분, 모범생의 말을 너무 맹신하지는 마시길. 그들은 당신의 생각보다 영악할 수도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감동을 줄 수 있다. 모범생의 관상학적 특징 중 하나는 초롱초롱하고 총기 있는 눈이다. 이 눈으로 상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 상대는 '저자가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구나!'하는 생각에 감동하게 된다. 여기에 간헐적으로 고개까지 끄덕끄덕해주면 상대는 나의 포로가 된다. 그저 타고난 명징한 눈빛과 적당한 리액션을 갖췄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타인의 말에 진심으로 귀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있다. '너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아.'라는 감동 섞인 말도 많이 들어봤다. 사실 남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거나 딴지를 건 적이 더 많지만 이번에도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상대의 말에 반박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모범생의 덕목 중 하나니까.
마지막으로 주변 사람과 사회의 잔소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모범생이란 사회가 정해놓은 루트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니까. 무릇 잔소리꾼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기준과 잣대에 맞추기 위해 이것저것 훈수를 두는 법인데, 그들의 기준과 잣대라는 건 높은 확률로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과 일치한다. 그들은 인생의 주기별로 공부해라, 대학 가라, 취업해라, 결혼해라... 등등의 레퍼토리를 준비해 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무한 잔소리를 시전한다. 하지만 이들의 오지랖도 모범생 앞에서는 (비교적) 힘을 못 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공부도 하고 대학도 가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난 결혼은 안 했지만.) 이미 퀘스트를 완료한 것이다. 퀘스트를 완료한 자에게는 잔소리보다는 '장하다'는 칭찬 세례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위 사람은 타고난 강박적인 성향을 십분 발휘하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착실하고 순종적인 일꾼이 되었으므로 이 상을 수여합니다.
쓰고 보니 퍽 자조적인 글이 된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의도다.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다 보니 위와 같은 장점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점도 많았다. 다음 편에서는 그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그럼 전국의 모범생 여러분이여, 오늘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