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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22. 2020

'이방인'의 넋두리

Why I am in Budapest


2020. 09. 30. (추석 전날 끄적인 일기)




도시의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건물들이 잿빛 기운을 뿜어낸다. 진정 가을이로구나...

카페에선 재즈풍의 캐럴 음악이 흘러나와 겨울도 덩달아 올 것이란 걸 알렸다. (특유의 겨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은) 찬 공기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용한 녀석이라 기특하고, 반갑다.



집을 나서며 -


버스 정류장 + 빨간 전선 버스


청명한 부다페스트의 하늘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푸르름이 참말로 좋다)




내일 비자 접수를 위해 이민국으로 향한다.

타지 생활을 하는 내겐 가장 예민한 시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나 말고도 모든 이방인들이 그러하겠지만)

타국살이라는 걸 극적으로 체감하는 순간이다.

어떤 때는 비자 준비가 너무 스트레스로 다가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의 충동감도 일어난다.

그렇지만 감정적인 것은 잘만 다스리면 곧 물러가는 것이라 본질적인 내 바람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비자 준비라는 것이 참 신물 나는 일이라..

인간이란 존재가 제도와 규범 아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란 전제를 비관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충실히 살아보고자 이 땅에 온 것이고, '이곳에 몸을 둔다'라는 것을 합법적으로 허락받아야 하는 과정이 치사하게까지 느껴질 때가 있다. (비자 신청 때가 되면 입병을 달고 살던 친구가 떠오른다. 헝가리 비자 취득은 보기완 다르게? 쉽지가 않다)

친구 중엔 구비서류 불충족으로 추방 통지를 받은 적(그것도 6개월이란 기다림 끝에) 있는데, 도대체가 그 기준이라는 것이 가끔은 엿장수 마음대로(이민국 직원에 따라, 혹은 그나 그녀의 컨디션에 따라 승인 여부가 좌지우지될 때도 있더라)라 꽤나 야속한 맘이 들지만 아쉬운 자가 우물 판다고 난 그 우물을 해마다 파헤치고 있고, 그 힘이 소진될까 염려되는 때가 한둘이 아니다. 바벨탑을 쌓아 올린 인간의 욕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비자 진행 과정도 불필요한 것이 되어있겠지?



5년 전, 뭣도 모르면서 내 힘으로 첫 비자 준비를 하였다. 이민국 주소를 들고 찾아갔고, 준비해오란 서류들 하나씩 더듬어가며 순진하게? 구비해 갔다. 세네 번 왔다 갔다 했을 거다. 갈 때마다 반나절의 시간은 기본으로 흘려보냈다. 오죽하면 이민국 갈 땐, 도시락 싸가란 말이 있을 정도로.(5년 전에 내 행동은 하나하나가 현재의 내가 본받고 싶을 정도로 천하무적이었다. 지금은 그리 하래도 못 하겠다.)

지금은 한국인들을 위한 비자 대행업체도 있고, 나 같은 외국인들을 위해 언제든 수수료만 내면 온갖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만들어 프로페셔널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헝가리 현지 회사도 있고, 또 주재원들은 회사를 통해, 학생들은 학교에 다닌다는 자료들로 증명해 이곳에 안전하게 안착한다.



문제는 지금의 나처럼 프리한 무리들. 일명 프리랜서?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백수 ㅎ)

나도 한때는 일하며 정신없는 상황에 현지 비자 대행사에 의뢰하여 순조롭게 비자를 취득했고, 어학원에 다니며 가까스로 이곳에 있을 이유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온갖 내용을 갖다 붙여 증빙서류를 준비해 겨우 거주증(비자)을 얻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갖가지 자료와 스토리를 동원해 비자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돈만 있으면 만사형통일 정도로 일이 쉽게 흘러갈 수 있다. 근데 이번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내 힘으로 일궈내고 싶었다. 편법을 쓰고 싶지도 않고, 남의 힘을 빌려 살아가는 것도 싫어졌다. 그냥 정직한 서류들을 가지고 순전한 믿음으로 이민국으로 돌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험난하든, 무난하든 길은 분명 있다. 수식어의 차이이지, 명사는 같다. 명사가 내 목적이니 수식어는 아무렴 어때. 정신만 온전하면 되는 것이다.








헝가리로 오기 전, 모두가 다 내게 그랬다.

왜 그곳엘 가냐고.

그냥 결혼(이나) 하고 지금처럼 편히 살라고.



편히? 그 기준이 뭐지?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며 따박따박 월급 받는 것이 편한 삶인가? 내 마음이 이렇게나 괴로운데도? 그들이 보기에 안정적이면 내 삶은 편안한 건가?

그럼 반대로 내 기준을 그들에게 적용시켜보고 싶다.

'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라고. 너답게'

그럼 그들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던질까.

"나다운 게 어딨어. 그냥 사는 거지. 다 그러고 살아. 배부른 소리 그만해."



배부른 소리라...

해외에 나가 살면 배가 부른 것인가. 이를 위해 내가 포기하는 수많은 것들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이 다가 된다. 상관없다. 그 생각도 그들의 몫. 이 생각도 나의 몫이다.



물론 가능한 말이고,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냐에 달린 것이기에 각자에 맞는 답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내 선택에 반기를 드는 사람 치고 내가 따르고 싶은 삶은 없었다. 세상 권세 다 쥐고 있는 사람이 내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사모하던 생은 그만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삶이었다.

본인의 삶에 불만인 사람은 남의 삶인 내 삶조차 그렇게 될 것이라 섣불리 판단했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거쳐 나가는 이는 어떤 것이든 나와 내가 택한 길을 존중해줬다.

그 당시 나에겐 변화된 삶이 절실했다.



뭔가 쓰다 보니 냉소적인 글이 되어가고 있는데 골자는 그게 아니다.



내 주변이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난 인공지능 AI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흔들렸고, 머리 빠지게 고민했고, 그렇지만 결론은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 고되고 외롭더라도 내가 택한 길이니 불평불만 없이 중심 잡고 살아가는 것. 대신 무척이나 외로울 것은 각오한 일이었다. 결국 인간은 언제든 외로워질 수 있는 동물이다. 그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험난하지. 삶은. 그 어떠한 것이든. 삶이 쉬울 거라고 누구도 말한 적이 없다. 특히나 내 고집부려 택한 길은 더욱이나 전례가 없는 황무지와도 같은 곳이기에 어디 흉내 내어 걸을 것도 없어 더 고독하지. 그렇지만 걷는 거지, 뭐. 이런 길도 있는 거지.

어쨌거나 내 걸음을 걷다 보니, 다행하게도 행복은, 감사는 자연스레 따라오고, 배가 되더라. 내가 택한 것에 따라오는 성취감은 어떤 값을 치러도 모자랄 만큼 크고 놀라웠다.






참고로 내 행복함의 기준은 ‘돈, 사회가 정해놓은 때에 맞게 하는 결혼, 해외에서의 멋진 삶’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행복으로 삶 전체를 감쌀 필요는 없다고 본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가 아닌, 존재하는 우리이기에. 그저 살아가는 감정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주변과 비교하지 않는 나만의 삶, 책 한 자락 더 접할 수 있는 시간, 잔고는 부족해도 '내 삶이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충만한 기분, 견문을 넓히는 것, 주변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삶을 나누는 것, 온전한 것에 대한 가치를 논하며 (결혼 잘하는 것, 주식과 부동산이나, 근사해 보이는 것들이 아닌) 아무 사심 없이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가짐, 각자의 가치에 대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열린 마음 등 그런 것이 내겐 행복이다.



물질보단 상황, 사상적인 것에 욕심을 내는 편이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 그렇지만 경험(시간)은 남더라. 내 인생 통장에 빛날 정도로 차곡차곡 쌓이더라. 때에 맞게 그 기억이 나에게 다가와 힘을 주고, 용기를 건네주더라.

그렇다. 나는 내적 부유함을 지니고 싶었나 보다. 어찌 보면 돈보다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돈을 욕심내서 벌면 그만인데, 내면의 풍요는 욕심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저 주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원했다. 한때 내 모든 아이디는 'to be'였다. 친구들은 그게 그냥 의미 없는 영어라고 생각했을 건데 난 꽤나 고민하여 만든 것이었다. 한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철학)에 빠져 '존재한다'라는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였다. 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무신론적'이란 단어가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그의 문학적 예술성으로 받아들였고, 반대로 난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따랐다.



존재함의 배경을 이곳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난.







지난 5년간의 내 삶에 대한 피드백은?

'자알- 해왔다!' (내 삶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아. 내 마음에 귀 기울이길 잘했어. 나 근데 은근히 팔랑귀다. 그런 내가 모든 조언되는 말을 다 뿌리쳤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사람은 큰 일에 용감해진다. 작은 것엔 여전히 늘 쫄보이다.)



고독도, 슬픔도, 성취도, 만남도, 기쁨도, 절망도,

내가 걷는 길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남 탓할 마음 없고, 모든 과정이 거치고 나면 감사로 고백됨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부다페스트 뉴거티역 (4-6번 트램길)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퍼지는 묵직한 공기. 하늘을 파랗고 땅은 깊숙이 꺼져간다. 가을은 천지로 분간된 대자연의 성격이 극명히 갈리는 순간이라 마음이 더 붕-하고, 뜨나 보다.



올해의 남은 시간들을 경건하게 사용하고 싶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지. 그 공평함을 어떻게 누리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이 그들이 행한 것에 걸맞은 색채를 띤다. (난 만나는 사람들의 입고 있는 '색'에 관심이 많다.) 나의 이번 겨울을 단단하고 온화한 색으로 덧입히고 싶다.



요즘 내 예전 글들을 하나씩 돌아보고 있다.

씩씩하게 결의를 다진 내용이 많더라. '나였던 나'에게 힘을 얻고 위안을 받는다는 것은 꽤나 묘한 일이다.






그 어떤 것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일궈낼 수 없다. 도움의 손길, 혹은 상황이 따른다.

그래서 가끔 난 '선택'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선택해서 누군가의 삶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다면 모든 인간은 온전한 선택만을 했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인간은 주어진 것에서 허덕이거나 정신 차리거나 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늘 아래 새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 않았는가. 사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 그저 각자에게 걸맞은 환경에 던져지는 것도 같고.

선택의 과정을 거쳐 엄마 배를 고른 것이 아니듯 그저 삶은 선택이 아닌, 주어지는 과정 속에서 내 발길이 향하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 것만이 내 생에 허락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음미해본다. (하긴, 그것이 선택이라면 선택일지도)



다만, 다가올 것에 언제든 화답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지.

돌아보니, 부족하든 넘치든 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의 것이었다. 나 스스로가 위축됐든, 과신하든 했던 것뿐이지 상황은 항상 공평했다.

계속해서 감사함과 굳은 결단력으로 주어진 순간을 받아들여야겠다.

5년 후에 내 글을 봤을 때, 그때도 난 나에게서 동력을 얻고 싶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10월 1일에 민족 최대의 이방인이 된다. 하필 이민국 가는 날이 추석이라니... (굳이 의미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데 의미가 부여된다)

이민국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특유의 이단아 같은 기분을 맛본다. 온 세상의 낯선 자들이 모인 집결체이니, 더더욱 그렇겠지.



이맘때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연락 오는 것 중 하나가, "추석에 거기서 뭐해? 송편은 먹었어?" 하는 질문이다.

이건 마치 "헝가리는 건국기념일인데 넌 지금 뭐해?"하고 묻는 것과 비슷한 맥락 이리라.



지난 헝가리에서의 추석들은 바삐 보내서 상관없었다. 허나 이번 추석은 조금은 쓸쓸하게 다가올 것 같다. 




머르깃 다리 아래 꽃밭, 분명 색감이 다채로운데, 꽃들의 자태가 처연하게 느껴진다.



머르깃 다리 위, 가는 길에 '걷기'로 운동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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