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나와 일을 하다 보면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일들도 정말 많지만 어이없고 황당한 일들도 못지않게 많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경우는 너무 자주 보는 일이라 이제는 그 반대 상황이 비정상인가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원칙 따위는 개나 줘버린 조직에서 원칙을 말하다가 뼈도 못 추린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우리 사는 이야기. 치졸하게 남의 공을 가로채 자기 것인 양 으스대는 꼴을 보며 병에 걸려 실려갔다는 비극도 있다. 필요할 때, 잘 나갈 때는 '너밖에 없다', '내 사람이다', '우리는 영원히 한 팀이다' 하지만 살짝만 틈을 보이면 바로 토사구팽을 시전해 주시는 스릴러도 빈번하다. 그야말로 '오호! 통재라!'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오는 사회라는 곳.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에 매일 밤마다 술에 절어 들어오는 신식 인텔리 남편에게 배움이 적은 구식 부인이 '누가 그리 술을 권하느냐?'라고 물었더니, 남편이 ' 이 사회가 나에게 술을 권하오.'라고 했다. 구식 부인께서 호통을 치며 '그놈의 사회라는 녀석 내가 내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라고 말하자 남편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했다는 내용이 가끔 떠오른다. 담판을 짓고 싶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회가 너무나 많아서 누구부터 담판을 지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을 뿐.
최근에 정말 끝장을 보고 말아야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사건이 있었다. 정말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말을 이렇게나 많이 해 본 게 얼마만이냐(처음이 아니라는 건 사회에 던져진지 꽤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는 없고 일은 일이니 계속 진행해야 하고 책임자의 입장에 있으니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책꽂이 꽂힌 '난중일기'를 꺼내 들었다. 나보다 더한 '억울함'을 철저하게 승화시키신 분과의 만남이 절실할 때였다.
'난중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이순신 장군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님은 정말 위인 그 자체의 면모라서 감히 다가가기도 어려울뿐더러 본질이 다른 천상계의 사람 같아서 '극복'이나 '성취'의 과정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그에 반에 '난중일기'에는 '목놓아 울었다.', '너무 아파 하루 종일 쉬었다.', ' 어머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에 종일 울었다.', 등 인간적인 표현이 정말 많이 나온다. 갖은 고초를 겪고 백의종군하실 때도 아프고, 답답하고, 속 상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신에게는 13척의 배가 아직 있다고 결사의 의지를 불태우던 그 순간에도 길몽을 꾸었다고 믿으며 불안을 달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신다.
학생 신분으로 공부하던 때와는 다르게 '돈'을 벌기 시작하고 사회인으로 거듭나면서 알게 모르게 완벽주의 같은 강박증이 생겨버렸다. 아프고, 슬프고, 화나고, 억울한 감정들은 나쁜 것이며 결코 마음에 자리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감정을 통제하기 바빴다. 더 나은 미래와 성과를 위해서 현재의 감정 따위는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고, 언제나 완벽한 모습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뇌를 도배해야 한다는 강박증. '난중일기'를 읽으며 그 말도 안 되는 강박증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고 순간 밀려오는 감정들과 잘 마주해야 좋은 리더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일기를 가득 메운 감정의 가감 없는 표현들을 보며 감정과 잘 마주하고 스스로와 잘 지내셨던 이순신 장군님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스스로의 약함을 보듬고 슬픔과 분노에도 진심이셨기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주변을 돌볼 수 있었고 주위에는 언제나 따르는 이들로 넘쳐났다. 명량해전 전에 아무리 백전백승의 장수였어도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도전하는 리더 앞에 함께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물론 도망치는 자들도 여럿 있었지만 진심으로 함께하는 수많은 조력자들 덕분에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고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 어디에도 히스테리를 부리는 모습은 없다. 감정과 잘 어울리셨기 때문이다.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위치는 상하 직급을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다.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누르고 있으면 결국 '화병'이 된다. 화병 증세는 여러 가지지만 스스로를 괴롭히다 결국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수준에 이르는 리더들이 너무 많은 상황이 어쩌면 이 사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의 감정과 잘 지내는 법을 모른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어른이들에게 아무도 '너는 지금 그런 감정이 정상이야.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고 슬기롭게 감정과 잘 어울려 보렴.'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사회에 나와 아주 긴 시간을 보내야 하고 또 잘 마무리 지어야 하므로 이순신 장군의 상담을 받아보는 걸 추천한다.
결국 주변에 사람이 남아야 큰 일을 도모할 수 있고 함께 성장할 때만큼 보람찬 것도 없으므로 더 많이 나와 친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들이야 어디에 간 들 없을까. 문제는 거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나를 지극히 인간적으로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냅다 술만 마시는 약한 자아로는 다양한 모습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사회와 맞설 수 없다. 매일의 나의 감정을 잘 어루만지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에만 집중하는 어른스러움을 갖춰갈 때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뜻을 같이 하고 사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힘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