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톳문어솥밥
제주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였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한겨울조차 검은 땅 위에는 부룩부룩 살 찌우는 채소로 가득했으니.
시장에 가도 채소가 넘쳐 났지만 제주는 집 안 마당이나 주변 등에 텃밭을 돌보는 경우가 많아서 이웃 간 채소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아무튼 채소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호사를 누렸던 것이다.
나야 키우기 쉬운 상추나 토마토, 감자 등 몇 가지 하는 게 다였지만 옆집 할머니는 대단했다.
안 마당에는 블루베리 나무가 수십 그루가 있었고, 집 주변의 텃밭은 또 따로 있어 실로 다양한 작물을 농사지었다.
할머니는 늘 우리 집 대문 앞에 무심하게 채소를 두고 가셨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려 하면 남아도는 채소일 뿐이라 민망하다며 멀찍이 도망가셨다.
늘 기쁜 마음으로 받아먹으면서도 종종 막막해지기도 했다.
무가 열다섯 개 놓여있거나 할 때 말이다.
심지어 무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거대하고도 뚱뚱한 무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저기 나눠 주고도 열 개나 남았다.
뭇국도 끓이고 들깻가루 넣어 볶아 반찬으로도 먹었다.
생선 아래 깔아 조림도 수십 번을 해 먹었으나 무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무김치라고 해봐야 깍두기 정도 담그는 게 다라서 더 그랬다.
베란다에 켜켜이 쌓여 있는 흙 묻는 무를 볼 때마다 녀석들, 혹시 늘어나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워 세워보기까지 했다.
도통 이 무라는 식재료를 어떻게 소진해야 할지 감이 안 오던 차.
제철 맞은 굴 한 봉지와 함께 밥을 지어 보았다.
바다 내음 그윽한 굴과 무의 시원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맛있게 먹었다.
다음 날에는 별 다른 재료 없이 무만을 들기름에다 살짝 볶아 다시마 한 장 넣어 밥을 지었다.
목표는 무 소진일 뿐, 사실 별 다른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한 입 맛본 순간, 이제야 제대로 무 맛을 봤구나, 싶었다.
특유의 알싸한 향과 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었다.
고소하면서 달달한 풍미가 은은해 그 자체만으로 일품이었다.
그렇게 한 동안 밥 지을 때마다 무를 넣었다.
식구들이 또 무냐며 지겨워했을 즈음은 아예 갈아서 물 대신 밥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넘쳐 나던 무는 서서히 소진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 식탁에 일주일에 한 번은 솥밥이 올라오게 되었다.
딱히 재료를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아도는 제철 채소만으로 충분.
대충 썰어 쌀 위에 올린 후 밥 지으면 된다.
멸치액젓이나 간장 등으로 간하고.
(그러나 간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싱거우면 테이블에서 간장 뿌려 먹으면 되니까)
무언가 밋밋하다면 다짐육이나 해산물 등을 추가하면 된다.
제주를 떠나온 지 어느덧 3년째.
마트에 갈 때마다 무시무시한 농산물 가격에 여전히 놀란다.
채소가 남아돌아 걱정이던 복에 겨운 시절이 그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던 옆집 할머니가 준 커다란 놈삐(제주어로 무)가 특히나.
무톳문어솥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