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컷 카레-푸팟퐁 커리]
도착한 다음날, 다시 말해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려던 아침이었다. 미리 봐 둔 브런치 카페가 있어 들뜬 마음으로 일찍 숙소를 나섰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범퍼에 무언가 부딪혀 퍽, 소리가 났다. 내려서 확인해 보니 낡은 나무 상자였다. 차는 멀쩡했지만 나무 상자가 좀 벌어져 렌터카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업체는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시라 신신당부를 했다. 때마침 기가 막히게 순찰차가 눈앞에 지나가 차를 불러 세웠다. 두 명의 경찰이 심각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나 또한 긴장이 되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자, 선임으로 보이는 중년의 경찰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차를 빙 돌며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 앳돼 보이는 경찰은 손바닥만 한 수첩에 무언가 끼적거리고 있었다. 호기심에 못 이겨 슬쩍 들여다보니 거기, 우리가 차로 친 나무 상자가 그려져 있었다. 나무 상자의 안과 밖, 음영을 정확하게 표현한, 거의 소묘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차를 다 살펴본 경찰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은 언제 왔으며 이 숙소는 어떻게 예약했고, 어디를 갈 참이었는지. 사실 나무 상자와 썩 상관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성실히 답했다. 얼마 안 있어 경찰은 별 다른 조치 없이 일단은 알았다, 라는 말을 남긴 후 떠났다. 마치 차 껍데기를 들고서 걸어가는 거처럼 보일 정도로 느릿느릿한 운전이었다.
좀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리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웬걸, 이번은 또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기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좀 전까지 잘 나가던 차가 갑자기 왜? 당시 초보 운전자였던 남편은 도통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짐작조차 못 했다. 또다시 렌터카에 연락해 보니 다시 연락을 줄 때까지 차를 사용하지 말라는 답신만 왔다.
숙소는 마을에서도 좀 떨어진 언덕 위 자리해 있었다. 하물며 번화가는 터무니없이 멀었다. 네 살 배기와 아기띠에 매달려 있는 두 돌 아기를 데리고, 도대체 차 없이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인터넷마저 잘 안 터지는 지역이라서 온라인 지도 보는 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차장에서 벙쪄 있었다.
그러다 일단은 걷기로 했다. 12월, 서울은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었는데 거기는 봄이 먼저 온 거처럼 따뜻해 어린아이도 걸을만했다. 언덕을 내려가 마을을 지나니 내 키보다 높은 사탕수수밭이 나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락사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밭 너머로 멀찍이 육중한 리조트가 서너 개 보였다. 근처에 해수욕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바다 해 자가 쓰인 표지판 따라 좀 더 걸었다. 우선 바다나 가보자, 하고.
바위 때문에 물살이 세지 않아 파도 소리마저 참 잔잔한 해변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어디에선가 nat king cole의 unforgettable이 흘러나왔다. 거기 웬 식당이 있었다. 새하얀 천막 아래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입간판에는 네팔 레스토랑이라 쓰여 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진한 카레 냄새가 솔솔 풍겼다. 아직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상태라 우리는 주저 없이 테이블에 앉아 카레를 주문했다. 내친김에 오키나와 대표 생맥주, 오리온까지 시켰다. 음식은 생각보다 금세 나왔다. 커다란 새우와 토마토가 들어간 카레였는데, 모든 재료가 너무나 부드러웠고, 슴슴한 듯 매콤한, 다소 낯선 카레 맛이었다. 거를 뻔한 아침 식사를 거하게 마치니 그제야 피곤이 몰려들었다.
달리 오갈 데 없던 우리는 해변에서 주먹만 한 소라게가 뚜벅뚜벅 걷는 거나 구경하면서 빈둥거렸다. 애들은 모래 놀이를 하기도 했고, 나는 그 옆에 드러누워 비행기에서 보려고 가지고 온 책을 마지막까지 다 읽어버렸다. 지루해질 즈음은 해안 마을의 좁은 골목을 산책하기도 했다. 주택과 주택 사이로 보이는 바다 조각이 반짝반짝 일렁이는 게 아름다웠다. 집을 삼킬 거 같은 우렁찬 나무들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새빨간 히비스커스, 담벼락 위 장식 삼아 올려놓은 조개껍데기, 눈 마주치면 환하게 웃는 검게 그을린 바닷가 마을 주민들까지. 거기, 진짜 오키나와가 있었다.
그렇게 해변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우리는 편의점에서 저녁 거리할 만한 음식을 사가지고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애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남편은 자동차와 시름을 하더니 결국에 시동에 걸리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었다. 핸들락이었다. 오전에 경찰과 대화가 길어져 남편이 아기를 안은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아기가 핸들을 만진 모양이었다. 겨우 핸들락 해제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다 져 어둑어둑해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오늘이 이번 오키나와 여행 중 최고로 좋은 날이 될 거라는 것. 자, 이제 차가 움직이니까 숙소에서 다소 먼 데까지 가보자, 그러며 맛집이라고 알려진 식당으로 달려가 저녁을 먹었다. 곧바로 숙소로 돌아오기 아쉬워 가로등조차 드문드문한 오키나와의 밤을, 낮에 본 경찰차처럼 느린 속도로 한참을 드라이브했다.
정체불명의 나무 상자가 거기 없었더라면, 그래서 애초에 정해둔 일정대로 알려진 하루를 보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여유로운 여행을 만끽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적어도 아침 카레와 라거 맥주가 그렇게까지 잘 어울리는지는 아마 평생 몰랐을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먹은 카레와 똑같지 않지만, 꽤 비슷한 카레인 푸팟퐁 커리. 몇 해 년 전부터 꽤 즐겨 만드는 카레 중 하나다. 일단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거니와 거기다 무거운 채소가 들어가지 않으니 재료를 오래 익힐 필요가 없어 아침에 만들기 간편하기 때문. 양파와 피망, 토마토 같은 채소와 새우나 게살을 살짝 볶다가 코코넛 밀크(코코넛 밀크가 없는 경우 물과 우유, 설탕 1t을 섞어 넣는 것 추천)와 푸팟퐁 커리 분말 넣고 끓인다. 모든 재료가 푹 익으면 마지막으로 풀어놓은 계란을 부으면 된다.
그 바다 앞에서 읽은 책 사이사이에 모래사장의 가는 모래가 여전히 끼어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기념품이 또 있을까. 그 책을 펼칠 때마다 어디에선가 신선한 바닷바람 내음이 섞인 카레 향이 솔솔 나는 것만 같다. 그러면 나는 또 절로 카레를 만들고 싶어 진다.
푸팟퐁 커리 간단 레시피
① 양파와 파프리카, 토마토 등의 채소와 새우나 게살을 살짝 볶는다.
② ①에 코코넛 밀크를 모든 재료가 잠길 듯 말 듯 한 정도로 붓는다. (없으면 물 반 우유 반 추천)
③ 물에 게어 놓은 푸팟퐁 커리 분말을 ②에 넣어 끓인다.
④ 모든 재료가 푹 익으면 약불로 줄인 후 풀어 놓은 계란을 넣고서 원을 그리듯 천천히 젓는다. (그래야 계란이 뭉쳐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