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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Dec 28. 2020

살다보니 알게 된 것들 (2)

지켜봅시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사가 모레로 다가왔다. 이 동네에서 삼십년을 살았는데, 연고없는 동네로 옮겨가려니 마음이 좀 그렇다. 전학가기 전에 드는 기분이랑 비슷하다. 좋다, 나쁘다는 아니다. 설레고, 두렵다. 기대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다. 인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불확실성이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좋을지 나쁠지 몰라서, 설령 좋을 거라 예상이 되어도, 안전한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범위, comfort zone에. 


나는 중학교를 세군데 다녔다. 그럴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전학 전날 밤 느꼈던 그 기분이 지금도 선뜻하다. 미지의 세계... 나는 내일 '모르는 세상'의 일원이 된다. 그 막연함. 그 막막했던 어둠. 

예민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비교적 무난하게 새로운 세상에 적응했다. 실제의 나보다 더 쾌활해야 했고, 더 무던해야 했지만 그럭저럭 잘 해냈다. 나중에야 알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전학의 경험이 내게 남긴 흉터를 봤다. 쉽게 마음을 열지 말 것, 사회성의 가면을 쓸 것, 관찰하고 파악할 것,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 것, 그래봤자 괴로울 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정붙이지 말 것. 내가 어디에도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세 개의 중학교 때문일까. 


이사를 준비하면서 괜히 센치해져서, 내 지난 삶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시간은 물에 잠겨있고, 어떤 시간은 뚝 떼어내질만큼 파삭거리고, 또 어떤 시간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내 인생의 모든 시간들이, 그 모든 지점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생의 큰 방향을 결정지었던 선택들이 구비구비마다 이정표처럼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시간 속에 있는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그 시간을 빠져나온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다. 정교하게 엮여있는 내 지난 삶의 그림을. 아하, 그때가 그렇게 중요했구나, 그때 내 인생이 방향을 틀었구나, 하고. 원인없는 결과는 없고, 지금의 나는 지난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한 중요한 선택은 내 의지가 아니라 우연의 결과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우연은 신의 윙크라고. 삶이 계획대로, 계산대로 되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 계획대로 이끌려고 애를 쓸수록 수렁으로 끌려들어갔던 기억만 있다. 지쳐버린 진흙투성이의 내가, 의지-혹은 욕망을 내려놓고 "될대로 되라지!" 항복선언을 하면 그제서야 삶은 제자리에 맞는 조각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를 성취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물고 내가 기필코 이걸 얻고야 말겠다고 뛰어든 일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냥 해 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하며 누군가 툭, 어깨를 밀어줄 때 결과가 좋았다. 애쓸수록 어그러졌고 힘을 빼면 결과가 좋았는데, 그런 걸 뜻하는 용어(law of reverse-effort)까지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KBS에 지원할 때도 그랬다. 언론고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언론사 입사가 치열했을 때였고, 나는 당시 석사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 지원마감 한시간 전, 대학원실에 있는데 농구를 하고 땀에 젖어 들어온 남자친구가 KBS에 지원했냐고 물었고, 안 했다는 내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연습삼아 지원이나 해보라고 툭 한마디 던졌고, 자연스럽게 '그래? 그냥 지원이나 해볼까?'하며 거의 마감에 맞춰 지원을 했다. 내가 학교의 인터넷 앞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차피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없이 시험을 봤는데, 그해에 유독 필기시험이 쉽게 출제되어 준비를 안한 내게 유리했다. 얼떨결에 3차 면접까지 통과했고, 남자친구가 자기 덕분 아니냐며 으스댔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와 헤어진 지 오래고, KBS는 여태 근속중이니 참 사람일은 모르는 거구나 싶다. 

첫책을 썼을 때도 비슷했다. 회사에서 만난 누군가 안부를 묻길래, 정말 난데없이, '책이나 쓸까봐요, 혹시 출판쪽 아는 분 계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출판과는 1도 관계없었던 그 누군가가 '정말이요?'하면서 바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내 첫 책을 기획해주신 분을 카페에서 만났다. 그 모든 과정은 신속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당연히 그렇게 되기로 되어 있었다는 듯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던 일은 셀수도 없다. 의지가 강할수록, 기대가 클수록, 조바심과 두려움이 커졌고, 결과는 매번 어그러졌다.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의지(욕망)->방해->더 큰 의지->지연->더 불타는 의지->실패->분노->좌절->체념(될대로 되라지)->뜻밖의 해결 또는 변화(내가 계획했던 것과 다른).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내맡김의 힘, 같은 걸 어렴풋이 느끼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내 인생의 큰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게 아니지 않을까? 내 좁은 시야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더 좋은 결과로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닐까? (마이클 A.싱어의 <될 일은 된다the surrender experiment>는 내맡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게 이런 뜻이지 않을까 싶다. 


몇년전 나는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 애인 때문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되는데 누구 마음을 통제하겠다고!) 그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고, 그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고, 그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좋았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의 간극이 점점 커지면서 미칠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친한 동생에게 한참 그것을 하소연하던 중, 그녀가 문득 말했다. 


"그냥 한번 지켜봐. 우리 사이가 어디로 가는지 한번 지켜보자, 하고."


순간, 내 안에서 울리던 모든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었다. 그래, 왜 나는 지켜보지 못하는 거지?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 뿐인데 말이다. 가만히 상황을 응시하는 것, 고요히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그것말고 내가 뭘 할 수 있냔 말이야. 그것은 그 남자 뿐 아니라 내 인생에게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태도를 바꾸자마자, 그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는 사라졌고, 놀랍도록 관계가 좋아졌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통제하려 하지 말 것. 최선의 결과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처럼 속이 시끄러울 때, 불안감과 조바심이 올라올 때, 낯선 미래가 두려울 때, 그녀의 그 말을 떠올리는 것이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거 봤어? 내 인생에서 좋았던 것들이 내 의지로 얻은 것들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 지금 여기에 고요히 존재하는 것,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내 몫이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생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다. 그래서 비대한 에고의 소유자인 나는, 여전히 취약해서 자꾸 의지를 끌어올리고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다. 자, 이제 지켜보자고,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우주가 나에게 어떤 것을 내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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