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명사] 육체적ㆍ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어 가는 시기. 성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하여 이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 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이성(異性)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춘정(春情)을 느끼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사춘기는 열일곱부터 시작이었다.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특히, 친구들과 함께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친구에 의해서 울고 웃고 그 어떤 것보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캐나다 고등학교 시절,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려면 한 장에 약 만원 정도 하는 국제 전화카드를 사서 고작 10-15분 통화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친구들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커져만 갔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10학년 영어 클래스에서 같은 수업을 듣던 E와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E도 나와 같은 나이에 외동딸이었으며 부모님께서 유학을 권하셔서 캐나다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다. 다른 한국 친구들은 어머니와 같이 사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어서 하교 후에 따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나는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E와 자주 놀러 다녔다. 그리고 E의 소개로 다른 학교 한인 친구들도 알게 되었다. 공부보다는 E와 노는 게 재미있었고 매일 E와 통화를 하며 그녀가 좋아하는 Y오빠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하루는 E가 Y오빠 생일 선물을 사러 같이 다운타운에 있는 쇼핑몰에 가자고 했다. 다운타운은 가본 적이 없어서 너무 설레었다. 그녀는 오빠를 위해 그가 좋아하는 쿨워터 향수를 사고 싶다 했다. 그런데 그 향수는 그녀가 생각한 금액보다 조금 더 비쌌다. 그녀는 다음 용돈 받을 때 주겠다며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 하였고 나는 흔쾌히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까맣게 잊었고 나는 말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녀가 내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먼저 말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 당시엔 그게 굉장히 유치하게 느껴져서 그냥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피하는 게 느껴졌는지 나에게 직접 이유를 물었고 나는 내가 돈을 빌려주었고 그것을 바로 갚지 않는 그녀가 원망스러워서 그녀를 피해 다녔다고 말했다. E는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솔직하게 먼저 말을 안 했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는지 그 자리에서 돈을 바로 주었고 그 이후 우리는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다녔고 그녀는 학교를 제대로 출석하지 않아 이미 학교로부터 경고도 받았다고 그녀와 같은 홈스테이를 하는 친구에게서 듣게 되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녀는 자기가 향수병이 심하게 걸린 것 같다며 죽고 싶다고 말하였다. 아무도 자기를 신경 쓰지 않는다며 말이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도 한국이 너무 그립고 부모님께로 돌아가고픈 마음이었는데 이미 그녀는 죽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이 곳 생활이 싫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그녀의 집으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가겠다고 하고 홈스테이 아줌마께 말씀드렸다. “E가 너무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E네 집에 다녀와도 될까?” “J, 안돼. 내일은 스쿨데이잖니. E에게 낼 학교에서 만나자고 해!” “그래도 E가 너무너무 아프다는데 E네 집에서 자고 내일 학교에 같이 갈게.” “ 미안하지만 안돼. 나는 네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J, 어서 가서 잘 준비하렴.”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홈스테이 아줌마는 내가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E에게 바로 전화해 못 갈 것 같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거봐. 너도 내가 죽든 말든 신경 안 쓰잖아. 됐어. 넌 그냥 잠이나 자.” 나는 내게 섭섭해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콱 죽어버려도 아무도 모를 거야. 너밖에..” 나는 그녀의 마지막 그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는 당장 그녀에 집으로 가겠다고 말하였다. 이미 아줌마, 아저씨는 잠이 드신 것 같았고 나는 택시를 불러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불러둔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와줘서 너무 고맙다며 다른 친구들도 불렀으니 그녀의 친구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미 판은 벌려져 있었고 걔 중에는 술에 취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홈스테이 아줌마, 아저씨가 혹시 잠에 깨지는 않았을까 너무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E가 활짝 웃으며 밝아진 모습을 보게 되어 뿌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진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E의 친구가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었고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려했으나 현관문에 보조 잠금장치가 되어있는 게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살살 밀었다. 대형견 제이크가 잠에서 깼는지 짖기 시작했다. “노 제이크. 짖지 마. 나야 나라고” 야속하게도 제이크는 계속 짖었고 아줌마, 아저씨 방에 불이 켜지며 누군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J, 너 외출하지 말라고 했는데 외출했다가 온 거니?” “응, E네 집에 다녀왔어. E가 향수병에 걸려서 너무 우울해해서”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자. 어서 가서 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내 방으로 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아픈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다녀온 것뿐인데 그것을 이해해주지 않는 홈스테이 부모님이 너무 밉고 싫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홈스테이 아줌마, 아저씨랑 마주치기 싫어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나는 유학생 담당 카운슬러 W에게 불려 갔다. 그리고 거기엔 교육청에서 나오신 한국인 상담 선생님도 계셨다. “오늘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아니?” “아니요, 모르겠어요.” “너 어제 홈스테이 부모님 몰래 외출을 하고 왔더구나. 그게 얼마나 크게 잘못된 행동인지 아니?” “그럼 친구가 아프다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게 맞는 걸까요. 친구가 많이 아픈데도요?” “그 친구에게도 홈스테이 부모님이 있어. E가 그걸 홈스테이 부모님께 말하지 않고 너를 밤에 불러내었다는 게 참 실망스럽구나. 우리는 이번 일을 한국에 계신 너와 E의 부모님께 알릴 거야.” “네,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희 부모님도 제가 아픈 친구를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면 이해해 주실 거예요.” 나는 너무 당당했다. 나는 마음이 아픈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갔고 그녀가 나로 인해 죽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몰라주는 캐나다 어른들이 너무 싫었고 그들은 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나와 같은 나이에 친구가 나처럼 유학을 와있는데 향수병이 심하게 걸려 죽고 싶다 했다고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해 그녀의 집에 택시 타고 다녀왔다고 말이다. 그리고 홈스테이 아줌마, 아저씨가 걱정할까 봐 그녀에 집에서 자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문 보조장치가 잠겨 있어 나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런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학교 카운슬러에게 모든 일을 고해서 나를 문제아 학생으로 만들었다고 말이다. 나는 여기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싫고 홈스테이를 옮기던지 학교를 옮기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한 행동이 옳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일이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내 성격을 알고 계셔서 우선 직접 학교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E의 어머니는 바로 다음 날, 한국에서 직접 오셨다. E의 출석일수가 모자란 데다가 나를 야밤에 불러내었다는 이유로 그녀는 정학을 받았고 화가 난 E의 어머니는 E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그리고 E는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갔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우선 같은 학교 친구네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겨울 방학 때 부모님이 캐나다로 오셔서 같이 전학 갈 학교를 알아보러 다녔다. 엄마는 누구한테 들은 건지 상당히 흥분된 상태로 다시는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엄마인데 이번 일로 인해 대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넓은 곳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학을 보낸 것인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겨서 엄마도 나에게 굉장히 실망을 한 것 같았다. “엄마, 나는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있잖아. 그럼 나는 또 친구한테 갈 거야.” “알아. 네가 친구들을 많이 믿고 의지 하는 걸. 그래도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주는 캐네디언 홈스테이 아줌마, 아저씨 말은 곧 엄마, 아빠의 말이야. 엄마는 한 번은 이해해 줄 수 있지만 두 번은 안돼. 그리고 아줌마, 아저씨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응…” 엄마가 나를 완전히 이해해준 것 같지 않아 너무 섭섭했지만 그래도 엄마,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유학 생활의 시작은 첫 단추가 제대로 껴지지 못했다. 나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수업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ESL 담당 선생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그녀의 앞에 서면 말도 버벅거렸으며, 한국인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한국인 없는 수업은 빠져버리거나 드롭 해 버리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잘 못하거나 어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미루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사춘기의 반항을 핑계로 내가 피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회피해 버리고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에 나는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지 잘하는 아이였는데 내가 무언갈 잘 못한다는 사실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 행동 자체가 불완전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나는 불완전한 행동을 하는 불완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