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시간의 하늘길 - 고양이 살려~
싱가포르로 출국하는 날 아침.
동물병원에서 알려준 우편 트래킹 번호를 밤새 확인하느라 눈이 퀭했다.
잠이 부족했지만, 비행기에서 자면 될 터.
어서 USDA (미국 농무부) 인증
디스코 (고양이 아들 시스코와 고양이 딸 데이지)의 건강증명서를 가지러 가야 했다.
살던 집 매매는 떠나기 일주일 전에 결정됐고,
자동차는 남편 출국 전날에 팔았다.
그리고 고양이들의 최종 건강증명서는 출국 당일에야 받게 된 것이다.
모든 게 막판에 마무리되는 게 신기하면서도, 묘한 쾌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할아버지께서 동물병원까지 데려다주셨다.
건강증명서를 건네주는 동물병원의 직원도 내게 안도의 미소를 보냈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서류를 점검하고 디스코의 짐을 챙겼다.
이제 신경안정제를 먹일 시간.
고양이 봉사단체에서 수십 마리를 돌보는 이모님은 익숙한 솜씨로 약을 꺼내셨다.
시스코가 힘겹게 약을 삼키는 모습을 본 데이지가 침대 밑으로 숨어버렸다.
데이지: “힝~ 보기만 해도 너무 써! 나 약 안 먹을 거야!”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지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모님은 팔을 뻗어 데이지를 붙잡으려 했고,
데이지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 실랑이 끝에, 이모님 손이 데이지의 뒷발톱에 긁혔다.
하필 이전에 다른 고양이에게 긁힌 자리가 아직 아물지 않았던 터라 피가 났다.
붉은 피 한 방울이 데이지의 하얀 털 위에 떨어졌다.
편안한 비행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모님께 죄송했고, 디스코에게 미안했다.
티켓팅을 위해 항공사 데스크 앞에 줄을 섰을 때,
그제야 ‘정말 디스코와 함께 싱가포르로 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시어머님과 이모님이 함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인천까지 약 14시간 반.
인천에서 한 시간 반 가량의 환승 후, 다시 싱가포르 창이공항까지의 6시간 반의 비행.
하늘에서만 21시간,
공항 대기 시간을 포함하면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긴 여정을 앞두고 있었다.
‘드디어 간다!’
마음은 이미 태평양 위를 날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티켓팅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불안이 다시 올라왔다.
직원은 반려동물 동반 티켓팅이 처음이라 버벅거렸고,
옆자리 선배도 바쁜 듯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모든 절차가 끝났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보안검색대로 향했다.
보안 검색대 앞,
아이들을 캐리어에서 꺼내야 했다.
이모님이 데이지를, 내가 시스코를 안았다.
시스코: “여기 어디야? 이상해! 무서워!
엄마, 나 내려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시스코를 놓칠까 봐 더 무서웠다.
체력장에서 철봉 매달리기 하던 때가 떠올랐다.
시스코를 철봉이라 생각하고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앞서 있던 분이 양보해 주시고,
직원도 빠르게 처리해 주셔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드디어 탑승.
좌석에 앉자마자 우리 셋은 동시에 긴 숨을 내쉬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시스코의 울음은 절규 그 자체였다.
시스코: “고양이 살려~~~!”
디스코가 많이 울면 어쩌나 걱정돼,
미리 킷캣 초콜릿과 양해 쪽지를 준비해 두었다.
다행히 주변엔 빈자리가 많았고,
웬만한 울음소리는 비행기 엔진 소리에 묻혔다.
게다가 우리 디스코보다 더 크게 우는 인간 아가 둘 덕분에 눈총을 면할 수 있었다.
비행 중 수십 번, 수만 번 생각했다.
'디스코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내가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지금 아이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시스코: “엄마, 너무 좁아. 나가고 싶어. 화장실도 가고 싶어!”
데이지: “너무 답답해. 뛰고 싶어. 꺼내줘!”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까?
마음이 아렸다.
안전벨트 표시가 꺼지자마자 캐리어 뚜껑을 살짝 열고 아이들에게 츄르를 먹였다.
규정상 비행 중 반려동물은 좌석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캐리어를 안고 있도록 해준 승무원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시스코: “간식 더 주세요! 안 울게요!”
데이지: “간식, 간식, 너무 맛있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잠시 안심했지만,
아이들의 화장실이 여전히 걱정됐다.
기내 화장실에서 이동식 화장실을 꺼내 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들이 캐리어 안의 배변 시트를 잘 써주길 바랐다.
잠을 제대로 못 잤기에 비행 중 잠들 법도 했지만,
불안과 걱정에 30분 이상 눈을 감고 있지 못했다.
기내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무릎 위의 캐리어 안에 손을 넣어 시스코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라고 말했다.
시스코에게 한 말이면서, 내 마음을 달래는 말이기도 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인천까지의 비행이 예정보다 20분가량 짧았음에도,
티켓 재발권과 보안검색으로 여전히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디스코는 인천공항에서도 캐리어 밖으로 나와보지 못한 채
다시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엔 좌석 아래에만 캐리어를 두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비행 내내 아이들을 앞 좌석 밑에 두어야 했다.
인천 - 싱가포르 비행에서는 시스코와 데이지가 떨어져 있어야 했는데,
데이지를 데리고 있던 이모님은
“데이지는 모든 걸 체념했던 거 같더라.”라고 하셨다.
데이지: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나와 함께 있던 시스코는 첫 비행 때보다 울음소리가 더 커진 듯했는데,
오히려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 여겼졌다.
시스코: “나 여기에 있다고, 여기!”
디스코는 그 긴긴 비행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드디어 싱가포르 도착!
남편의 “도착장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공항을 나서기 전,
하루 종일 캐리어 안에 있던 디스코가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했다.
운 좋게 이중문이 설치된 화장실을 발견했다.
간이 화장실과 습식 사료를 준비하고,
디스코를 캐리어 밖으로 꺼내주었다.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켤 줄 알았는데,
두 마리 모두 겁에 질려 구석을 오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쓰려왔다.
잠시 후, 시스코와 데이지가 그릇에 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다시 아이들을 캐리어에 넣고 입국심사대로 갔다.
짐을 찾은 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남편과 손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먼저 나가신 시어머니와 이모님이 남편을 만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마지막 관문인 ‘검역’을 위해
디스코와 함께 공항에 남았다.
곧 이어지는 '디스코 싱여행기 10화'에서는 검역에서의 고군분투가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