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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맘 Sep 06. 2020

반(反) 미니멀리즘

천천히 이별하기.

 지난주 주말, 별이 유치원의 줌 수업이 결정되면서 우리는  컴퓨터를 거실로 옮겼다. 더위를 심하게 타기도 하고 피부가 예민한 별이가 기존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수업을 듣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온라인 줌 수업이 우리의 예상보다 당분간 '꽤' '지속'될 수도 있다는 엄마 아빠의 심각한 상황 판단 덕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컴퓨터 옮기기는 시작되었다. 컴퓨터 유선이 한정적이었기에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별이가 '가족방'이라고 부르는 방에서 컴퓨터와 함께 컴퓨터 테이블도 옮겼다. 대신 거실에 있던 '귀요미'와 '사랑이'의 집을 가족방으로 옮겼다. 귀요미와 사랑이는 작년 10월쯤 우리와 가족이 된, 별이가 이름 지어준 그대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육지 거북이들이다. 거실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귀요미와 사랑이는 별이가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눈에 띄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유독 예민한 성격의 사랑이는 거실에서 우리가 조금만 놀아도 은신처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고, 늘 작아서 마음이 쓰였던 사랑이가 먹이조차 먹으러 나오질 않아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별이'와 '거북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자리에 변화를 주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컴퓨터 테이블 가까이 있던 빨간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컴퓨터를 일반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았고 소소한 물건들은 빨간 이케아 6단 서랍에 넣어두고 사용하였다. 사실 이 서랍은 결혼할 때 장만하였던 것인데 직장을 관두고 별이를 만났던 그 이후로 내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이사를 여러 번 하였지만 워낙 가볍고 작은 서랍이라 물건들을 빼놓지 않고 서랍 채 이동하기만 하였다. 더욱이 그동안 사는 것이 바빠 나의 손길이 닿지 못하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도 오래전 별이를 만나기 전에 멈추었던 그 공간을 오랜만에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이 서랍이 벌써 8년이나 되었다니.


서랍 속에는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사용하던 공학용 계산기부터 시작하여 직장을 다닐 때 사용하던 갖가지 사무 용품들이 가득하였다. 학교를 아니면 직장을 떠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지만 나는 그때 사용하던 수첩, 펜, 지우개 따위와 이별하는 것이 많이 아쉬웠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주인 잃은 그 물건들이 너무 아까웠던 것 같기도 하다. 더욱이 먼저 일을 그만둔 선배가 내게 준 물건들이 내게는 필요하지 않았던 짐이었던 것을 경험한 이후 난 누군가에게 물건을 주는 것이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난 받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신랑에게 지난날의 나를 고백 또는 반성하였다. 그동안 신랑은 내게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할 것을 종종 이야기하곤 해왔다. 특히 내 옷을 몹시 못마땅해했는데 유난히 정리했으면 하는 어떤 티셔츠를 최근에 정리했을 때 신랑도 친정 식구들도 한 소리로 칭찬을 해 주었다. 그 옷을 예쁘다고 생각해 주는 것은 나와 별이뿐이었다. 별이는 그때만큼은 나의 입장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합리적으로 물건의 쓰임새를 잘 판단하여 잘 정리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서 내 주위를 살펴보니 그것은 지독한 착각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되어 쓸 수도 없는 물건들을 가득 껴안고 있었고 나에게 청소를 잘하지 못한다고 하는 가족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가만 보니 착각 속에 있던 것은 나였던 것도 같다. 신랑은 놀랍게도 내가 그 물건들을 왜 버리지 못하는지 이유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이 사람은 나보다 섬세할 데가 더 많았다.


 별이의 책은 물론, 장난감까지도 아주 부피가 큰 몇몇을 제외하고 여전히 우리 집에 자리 잡고 있다. 내 친구는 혹시 아기블럭이 지금도 집에 있는지 물었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정말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인 건가 또 잠깐 생각에 잠기었다.


 그동안 우리 집에는 별이의 책과 장난감이 계속 들어왔고 나간 기억이 훨씬 적다. 아기 별이가 좋아하는 오뚝이 장난감도 곰곰이 책도 여전히 있다. 별이 방뿐만 아니라 우리 집도 이미 포화상태가 된 지 오래였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그것을 정리하면 별이와의 추억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을까. 지금 내 눈앞의 별이를 두고 내가 지난날의 별이를 그리워했던 건 아닐까. 단지 별이와의 세계에 있다가 이제는 그 밖의 세계도 보게 될 여유가 생긴 것일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는 우리 집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대신 너무너무 소중한 추억이 있는 물건들은 제외하고. 나는 '조금씩' 정리해 나갈 계획이며 늘 그렇듯이 목표 시간은 딱히 정해두지 않았다.


아기 베베 블럭을 아직도 잘 갖고 노는 별이. 곤충 집이 되었다가 악어 집이 되었다가.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난 별이는 내가 빨간 서랍 속에서 찾았지만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비닐장갑과 주사기를 보고 몹시 기뻐하였고, 그것은 그 날 오후 별이의 훌륭한 놀잇감이 되어 주었다. 그 주사기 덕분에 난 개인 시간을 무려 3시간 넘도록 얻을 수 있었다.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별이는 처음에 주사기로 물감을 넣고 빼는 놀이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휴지로 공 만들기에 몰입해 있었다. 그리고는 본인이 똥을 굴리는 소똥구리 같다고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소똥구리는 자기 몸보다 더 큰 공(똥덩이)를 만들 수 있다는데 본인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나는 별이의 이야기를 마냥 귀엽게만 들으며 내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도 별이는 공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치 진짜 소똥구리처럼. 


본인의 취향대로 핑크색 똥덩이를 만드는 소똥구리 별이.

 그런데 정말 별이의 말처럼, 별이 소똥구리의 공처럼 그것은 볼 때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별이가 이대로 쉬지않고 거대한 공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간식도 거르고 만드는 별이가 너무 걱정되어 조용히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만들기에 재미를 흠뻑 느낀 별이 귀에 내 말이 당연히 들어올 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유전 탓이라 생각하면서도 또래 중에 지나치게 작은 별이가 늘 마음에 쓰였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약속했던 휴지를 다 사용한 후에야 공 만들기는 끝이 났다. 나는 휴지가 나의 예상보다 많이 들어있음에 놀라워했고 별이는 내가 후루룩 만든 스파게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맛있게 먹었다. 





반 미니멀리스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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