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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나 Sep 25. 2020

열한살, 선생님께 시(詩)를 받았다.

은사님을 그리며




  요즘처럼 마음이 어수선한 때에는 인생의 정답을 알려줄 스승이 절실하다.

  나는 선생은 되었으나 스승이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지식은 얻었으나 정답은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스승의 날이 되면 매년 찾아주는 제자들을 보며 적어도 나는 나쁜 선생은 아니었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올해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 문자와 전화로 만남을 갈음했지만,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옛 제자들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소녀들은 어느새 수능을 보는 고3 수험생으로 자라나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 고마운 아이들을 보며, 나 또한 마음속에 모셔둔 은사님의 추억을 떠올린다.




13살 아이들이 이제는 어른의 문턱을 넘었다. 그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에 발을 들이는 동안 가장 최악이었던 시기를 고르라면 나는 불안과 외로움이 최고조였던 초등학교 시절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그 시절을 소중히 추억하는 것은 한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이면 내가 언제까지나 떠올릴 그분.



  4학년 3반 호랑이 선생님



  1학년 때 선생님은 기억이 없고, 2학년 때 선생님은 무서웠으며, 3학년 때 선생님은 신경질적이었다. 부끄럼이 많았던 나는 칠판 앞에 나가 문제 푸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는데, 그럴 때면 앉아서는 풀리던 문제 앞에서도 머리가 깜깜 해지는 것이었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왜 문제를 풀지 못하냐며 다그쳤고, 문제를 푸는 내내 옆에 서서 엉덩이를 때렸다. (내 기억에는 왜곡이 존재한다. 그 선생님이 기억하는 당시의 상황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낮은 자존감, 불안, 상처, 외로움 속에서 만났던
  4학년 3반 호랑이 선생님.



  최고의 이야기꾼



  우렁찬 목소리와 화통한 성격 탓에 호랑이라 불렸던 선생님은 수업이 일찍 끝날 때면 책을 덮고 조곤조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그때에는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다. 주인공의 사랑과 복수, 모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는 어느새 숨을 죽이고,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재미있었던 그 이야기가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선생님께서 ‘자,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라고 하시면 주말 드라마의 엔딩을 본 것 마냥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 생활에서 ‘즐거움’이라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선생님에 대한 또 다른 기억, 시(詩)



  선생님은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 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시절 첫 칭찬을 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그 전에도 분명 칭찬을 받기는 했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을 보면 무작정 칭찬을 많이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님을 깨닫는다. 수박 겉핥기 식의 성의 없는 칭찬이 아니라 아이가 의미 있게 간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칭찬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칭찬도 양보다 질이다.


  선생님의 칭찬 방식은 다양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했던 것은 상으로 시를 써서 주시는 것이었다. 서예에 조예가 깊으셨던 선생님은 붓글씨로 한 자 한 자 곱게 적은 시를 아이들에게 선물해주시곤 하셨고, 나도 시 한 편을 선물 받았다. 지금의 내가 양 팔을 다 벌려도 부족할 만큼 긴 화선지에 쓰인 시의 내용을 어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종이를 잡고 쫙 펼친 어깨만큼 내 가슴은 '성취감'에 벅차올랐다.



  15년 만의 재회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 것은 4학년 때 이후 15년이 지난 뒤였다.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뒤, 학교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저렴한 가격과 널찍한 공간 때문인지 근처 학교 모임이 종종 있던 식당이었는데, 그 식당 나의 맞은편 자리에 낯익은 오래된 얼굴 하나가 보였다. 그 학교에서도 마침 회식을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선생님의 손을 잡고 식당에서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립고, 감사하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찾아뵙지 않았다는 데 대한 죄송함의 눈물이었다. 어느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에는 예전의 총기는 사라지고 없었고, 우리를 쥐락펴락 하시던 목소리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서울까지 오지 못하는 분들을 모신 고향의 식사 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미안하다며 큼직한 노란 봉투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선생님이 직접 쓰신 시 한 편이 담겨 있었다.




결혼할 때 찍어둔 선생님의 시. 지금은 소중히 표구되어 고향 집 내 방 벽에 걸려 있다.



 너로 하여
비로소 목숨 얻었네
세월에나 씻기는
강가의 이름 없는 돌멩이다가
 너로 하여
더하여
우리라는 이름도 얻었어라


나 너로 하여
비로소 귀 열었네
그저 흘러 예는
산섶의 바람이다가
나 너로 하여
예 이르렀네
더하여 생령 같은 훈짐도 얻었어라


나 너로 하여
비로소 꽃 피었네
석 달 열흘 장맛비에 뭉개어져 내린
흙더미 위의 들풀이다가
나 너로 하여
예 이르렀네
더하여 오색 꽃 피우는 사랑도 얻었어라


< 나 너로 하여 > 추영수





  선생님의 축시는 결혼을 하며 받았던 어느 선물, 어느 축하의 말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제자의 결혼을 축하하며 한 획 한 획을 그으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진심으로 축복받는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 끝없는 감사와 기쁨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채운다.


  때로 나는 얕은 생각과 글 몇 줄로 부끄럽고 감사하게도 좋은 선생님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여러 면에서 갈 길이 멀었다.


  몇 년이 지나도 아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채울 수 있는, 나의 은사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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