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낱말들: 김원영,김소영,이길보라, 최태규:사계절:2022
책을 읽으며 관심 키워드를 찾고 그 키워드를 진로나 흥미와 연결할 수 있는 단어로 확장을 하는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자율주행자동차'를 선정했다. 학생들이 키워드를 연결하는 것을 도와주다가 명료하게 연결을 잘 지어 기특하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대신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ㅇㅁ은 혹시 나중에 테슬라에 들어가고 싶어?"
"네.. 제가 운전을 좀 무서워해서요. 제가 개발한 자율주행자동차를 타고 다니려고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문이 막힐 일이 아닌데 막힌 이유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햇살이 좋은데 덥진 않았던 걸로 보아 봄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서로의 책상에 앉아 의자만 돌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래에 무엇이 되겠다기보다는 "너는 나중에 어떤 모습일 것 같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중에 한 명이 자동차를 몰아보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도 ㅇㅁ처럼 자동차가 좀 무서웠다. 사람 4명과 짐까지 싣고 다니는 내 몸에 몇 배나 되는 그 물건을 내가 컨트롤한다는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있었다. 다른 차들을 피하고 차선을 지켜서 다니고 엄청난 속도를 감내하는 것 또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음.. 나는 자동차를 평생 운전하지 않을 거야. 만약 꼭 개인 자동차가 필요하고 운전을 해야 한다면 운전기사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어서 차와 함께 운전기사를 고용할 거야."라고.
그날의 장면이 순간 떠올랐지만 ㅇㅁ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해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을 하면 나를 너무 옛날사람으로 볼 것만 같았다. 그 아이는 물리와 화학을 좋아하니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를 개발해 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내가 고등학생이 된다면 ㅇㅁ과 같은 생각이 가능할까? 역시 아닐 거다. 나는 아마 완전자율주행자동차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걸 이용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이 나이가 먹을 때까지 세상이 얼마나 급속도로 변하고 느껴져서 순간 많이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또 하나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내가 하지 못하는 걸 극복하고 만들어 가는 방향이 다르구나라는 것도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ㅇㅁ이 만든 자율주행자동차를 첫 번째로 타는 사람이 되고 싶네.'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그날 밤 좀 아쉬웠다.
'일상의 낱말들'은 장애를 가진 변호사 김원영작가, 코다인 이길보라작가,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김소영작가, 동물복지 수의자 최태규작가가 쓴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4 작가를 모은 분은 안수연 pd이고 이분이 보내주는 낱말들에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와 생각을 담아 에세이를 쓰고 이를 라디오에 낭독했었다고 한다. 낭독한 원고를 모으고, 여기에 이지양사진작가님의 사진이 들어가서 책이 완성되었다고 책의 '들어가며'에 적혀있다.
최태규작가님은 잘 몰랐지만 김원영작가님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통해, 김소영작가님은 '어린이라는 세계'를 통해, 이길보라작가님은 '반짝이는 박수소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분들의 글에 묻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했었기에 기대를 가지고 손에 들었다.
첫 번째 낱말은 '커피'였다. 각 낱말마다 김원영, 김소영, 이길보라, 최태규 순으로 글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김원영님의 '전투 식량 캔커피'를 읽는 순간 '좋다'라는 감이 왔다. 네 작가가 몸소 체험하거나 만나는 사람과 동물은 우리가 일상적 접하지 않거나, 접해도 직접적이지 않기에 모르고 넘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분명 보았을 텐데 보지 못한 이면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원영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공정과 평등, 배려, 함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노인 보호자에게 질병에 관해 설명하느라 목소리가 커지는 의사들, 다음 진료 예약일을 잡고 수납에 필요한 절차와 약 먹는 방법을 설명하느라 목이 쉬어가는 간호사들, 키오스트 앞에서 헤매는 이들을 돕는 지나가던 젊은 환자나 보호자, 바삐 움직이는 안내 도우미 직원들이 이 시스템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215
이길보라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지구에 있지만 우리가 우주만큼이나 모르는 바다를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허발 교수는 “모어는 우리에게 음성적 명칭뿐만 아니라 그와 결부된 개념도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모어와 함께 획득한 어휘와 형식은 인간의 모든 지적 행동의 토대로 기능하고, 모든 행위의 성과에 흔적을 남기며, 우리의 세계 해석과 사유는 모어적, 개념적 지식에 기초하여 거의 평생 이 틀을 뛰어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p. 84
-조금 더 사려 깊고 정중한 태도로 다른 세계로 건너가 보고 싶습니다. 온전히 그 세계를 만나려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더 많이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p. 86
김소영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차곡차곡 자라고 있는 나와 나의 아이,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아이(어른포함) 하나하나 보듬어 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시간은 한 톨도 남김없이 어린이를 이루는 데 쓰입니다. 시간은 쌓입니다. 아마 제게도 그렇겠지요. p. 354
최태규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를 스쳐 지나간 그리고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동물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짖지 말아야 하거나 짖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개에게 알려주고 싶다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이듯 이야기해 보세요. “누가 왔는지 나도 봤고, 와도 되는 사람이 온 거니까 손님을 환영하거나 할 일을 하면 돼.” 소곤소곤 얘기해 주면 한 번에 다 배우지는 못해도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끼리만’하는 낮은 목소리로 건네는 이야기에는 결국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동물은 사람보다 작은 소리를 훨씬 잘 들으니까요. p. 265
장애와 편견, 아이와 동물 등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 같은 것에 대해 나와 있는 사회 또는 과학 책이 매일 나온다. 책 속에서 현상과 통계, 뉴스 자료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자료를 읽고 있으면 객관적으로 세상을 변화해야 하고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지표를 보고 인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나도 비슷한 일에 참여할 일이 생기면 참여하게도 될 것이다.
반면 일상의 낱말들은 감정적으로 나와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게 만든다. 네 분의 작가님이 작가의 책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낸 이야기가 마음을 몽글몽글 순두부처럼 부드럽게 만들었다. 소중하고 작은 추억을 돌아보게 하면서도 같은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이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조금 더 멋진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내가 ㅇㅁ이 말 한 자율주행자동차를 개발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그리고 '나는 어떨까?'를 오래 생각한 것도 이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층권 안에서 오밀조밀 모여사는 우리의 모습 또한 거대한 우주와 같다. 이건 그냥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개념 같은 것이었다면 '일상의 낱말들'은 가슴으로 이해하게 한다. 다음에 자율주행자동차로 다시 이야기할 일이 생기면 "샘이 고등학생이었던 20여 년 전만 해도 자율주행 자동차는 생각도 못했으니 ㅇㅁ같은 친구들이 있으면 4단계 자율주행 자동차까지 내가 죽기 전에 만나겠네. 만들 때는 아이, 장애인, 함께 사는 동물들이 타도 편안한 차를 만들어줘. 그리고 그 차가 지나가는 동안 길을 다니는 모든 것들이 안전함도 생각해 주면 좋겠어. 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해 주어야지라고 다짐해 본다.
자율주행자동차를 만들 생각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그런 차를 만들어 낼 꿈을 가진 친구들의 시야를 넓히는데 일조가 되는 선생님이 된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니 쪼그라든 가슴이 펴졌다. 가슴을 펴면 목이 똑바로선다. 그러면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또렷해진 눈으로 세상을 보면, 먹구름 마저도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