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중국에서 손님이 왔다. 그이는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중국에서 온 손님을 기다렸다. 어떤 음식을 준비하면 좋겠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여름엔 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와도 반갑지 않다는 말이 있다. 이 더위에 어찌 손님을 맞이해야 할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고민스럽기도 하고 심난하기까지 했다. 둘이서 먹는 식사 준비도 여름엔 귀찮았으니 말이다.
중국에서 온 손님이 내려오기로 한 날 이틀 전에 연락이 왔다.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사모님과 함께 음식점에서 뵐 수 있겠느냐고. 나는 무조건 오케이라고 했다. 여름에 집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닌데 그 손님 참 센스 있다고 말하며 마음이 가벼워졌다. 식사 대접을 받고 우리가 근사한 카페에 가서 시원한 음료를 대접하면 그것이 더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더운 여름이니 말이다.
키가 훤칠하고 성격이 쾌활한 남편의 제자는 그이가 고등학교에 부임하던 첫 해 담임 반의 학생이었고, 고3 때도 다시 담임을 맡았다. 그때의 그이는 젊었고 매시간 교단에서 열정을 다해 가르쳤고 학생들을 열렬히 사랑했다. 오직 학교라는 공간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고 참다운 스승이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제자들 중에서 태경이라는 학생은 남편을 따라 교사가 되었는데 그 어떤 제자들보다 각별한 사제지간이 되었다.
태경이라는 제자는 서울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중국에 있는 한인학교 교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6년 넘게 한국으로는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멋진 교사로 생활하고 있다. 방학을 이용해서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퇴직을 하게 된 남편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딸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태경이는 남편이 주례까지 섰던 제자이고 서너 차레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으니 나와도 친숙한 관계였다.
남편은 교단에 서면서부터 자기 주도학습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이야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너무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남편이 교사생활을 시작하던 그때 당시만 해도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은 생소한 단어였다. 자기주도학습에 확신이 있었던 남편은 학생들에게 수업시간마다 과외 끊기, 학원에 안 다니고 스스로 공부하기를 열정적으로 선도했다. 어쩌면 자신이 맡은 국어라는 교과보다 자기주도학습을 설파하는 데에 더 심혈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 학생들 중에 남편을 믿고 학원과 과외를 그만두고 자기 주도학습을 한 학생들 무리가 있었다. 그중에서 태경이는 남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랐던 학생이었다. 태경이는 남편을 만난 뒤로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하지만 태경이의 실력은 사범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태경이를 격려했고 남편을 믿고 노력한 결과 국립대 사범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태경이는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울지역에서 임용고시를 봤다. 사귀던 여자친구가 서울에서 먼저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 경쟁이 심한 서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 임용고시에서 떨어지자 그이도 태경이도 엄청 괴로워했다. 그이는 태경이에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고 태경이는 합격소식을 못 드려서 죄송하다며 땅이 꺼지듯 한숨을 쉬었다.
세 번째 임용고시에서 태경이는 드디어 합격했다. 그때 합격소식을 전하던 태경이도 합격소식을 듣던 남편도 서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다가 좋아서 울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태경이의 아내는 태경이가 중국의 한인 학교에서 한국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이라고 했다. 오직 학교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내의 볼멘소리에 태경에는 우리 부부 앞에서 "저는 선생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요."라고 했다.
남편을 따라 교사가 된 태경이를 보면서 남편도 그랬겠지만 나도 많이 뿌듯했다. 교직의 현장에서까지 남편의 태도를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태경이를 보면서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이 학교에 재직 하는 동안 남편의 영향을 받아 교사가 된 수많은 제자들이 있다. 그의 제자 교사들을 볼 때면 무엇보다 남편이 슬그머니 자랑스러워진다. 누군가의 모델이 될 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것, 길라잡이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태경이 부부와 식사를 하고 카페에 가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는 인생의 선배로써 조화로운 삶에 대해서도 깊숙히 나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태경이가 "선생님! 이제는 졸업했으니 드려도 되지요?"라며 그이에게 묵직한 선물을 전했다. 웃으며 선물을 받아드는 그이를 보며 태경이는 딸과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는 아무것도 받지 않으셨어. 그대신 졸업하면 받겠다고 하셨다니까. 그래야 진정한 선물이라며. 맞죠 선생님?"
졸업한 이후에도 그이의 말을 이토록 잘 따르는 태경이를 보며 남편은 참 흐뭇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직생활의 열매와 같은, 열매 중에서도 가장 달고 잘 익은 태경이와 태경이의 가족을 보며 그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지난 날의 수고를 보상 받는 기분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