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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Aug 28. 2023

13. 남편이 울었다

여름 이야기

그이의 퇴임식이 있었다. 무엇을 입고 가야 할까? 사모님과 자녀분들도 참석하면 좋겠다는 학교 측의 연락을 받은 뒤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이의 회색 양복 색깔에 맞춰 레드 계열과 블루 계열의 재킷을 사진 찍어 가족 창에 올리면서 어떤 것을 입고 가면 좋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모두 블루 계열의 재킷이었다. 하얀 아사면 와이셔츠에 회색 양복을 입은 그이와 함께 남색 재킷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그이가 말했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 날이네”라고. 정들었던 일터를 떠나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 날, 함께 일했던 동료 교사들을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 그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퇴직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면서 이제 한 달이 남았고, 일주일이 남았으며 사흘, 이틀, 하루가 남았다고 출근할 날의 숫자를 세었던 그이였다. 이런 그이와 함께 동행하고 있자니 아쉬움이 날아들었다. 아니, 내가 아쉽다기보다 그이가 아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학교에 도착해서 우리는 본관 2층에 마련된 퇴임식장으로 가기 위해 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했다. 차에서 내려 본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남학생 예닐곱 명이 큰소리로 “선생님!”하고 부르며 그이를 향해 달려왔다. 새로운 국어 선생님과 수업한 지 2주가 지난 학생들은 숨을 헐떡이며 그이 앞에 다가서면서 외쳤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과 다시 수업하고 싶어요.” 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그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애틋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 서로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길이었다.


퇴임식을 시작하기 전에 교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국어과 선생님들이 그이를 찾아왔다. 선생님들은 그이를 보자마자 그렁그렁해진 눈물을 말없이 닦아 내며 서 있었다. 눈시울을 붉히는 선생님들을 보니 나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퇴임식도 시작하기 전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애써 감정을 누르면서 그이를 바라보니 그이 또한 눈물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애써 지워내느라 교장 선생님과 가벼운 농담이 오고 간 후, 선생님들과 우리는 울음 섞인 웃음을 머금고 다 같이 퇴임식장에 들어섰다. 국민의례와 특송, 학생 대표와 교사 대표가 남편에게 드리는 글, 학교장 회고사, 퇴임사, 특송, 축복의 시간 등등 떠나오는 자의 인사와 보내는 자들의 박수 소리, 눈물, 아쉬운 표정, 축하의 인사말들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 뭉클한 한 시간이 물 흐르듯 순식간에 흘러갔다. 사회자의 위트 있는 진행에 퇴임식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울다가 웃다가 또 울었다.


교장선생님은 회고사에서 “이제 마지막 스승이 떠나십니다. 권승호 선생님의 이런 모습이 앞으로 여러분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던 선생님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 스승으로 대우받고 있는 그이가 자랑스러웠고 이제는 그동안 펼쳐왔던 교사로서의 삶을 접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아렸다. 후배 교사는 송별사를 통해 남편에게 교육자로의 삶을 배웠고, 교육은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누차 말하던 그이의 뜻을 따라 실천하며 살아가겠노라고 했다.


송별사에 이어 다소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이의 퇴임사가 이어졌다. 지나간 학교 생활을 회고하던 그이는 학생들과 즐거웠던 활동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첫 담임을 맡았을 때 텅 빈 학교에 나와 교실을 청소하고 준비해 간 수건으로 책상과 의자를 깨끗이 닦았던 일, 아이들을 인솔하고 백일장, 논술 대회를 나갔던 일, 지리산 천왕봉으로 갔던 졸업여행, 눈 오는 날 반 아이들을 데리고 무모하게 모악산 정상에 올랐던 일, 영생고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고 3 기간 동안 시 두 편 이상은 외우고 졸업하게 했던 일 등등.  


지난 시간을 회고하다 잠시 멈추던 그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훗날 어느 병원의 침상에서 힘없이 누워 통증에 괴로운 날이 찾아올 때, 행복했고 아름다웠고 자랑스러웠던 영생고등학교에서의 기억들이 진통제가 되어주리라 믿는다고. 영생고등학교에서 만들었던 행복들을 떠올리면 아픔과 괴로움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고. 미래에 약해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지나간 시간들이 약이 되어주리라 믿겠다는 그이의 바람은 보람 있었던 교단에서의 시간들을 평생 간직하며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퇴임식을 마치고 영생고 모든 교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점심식사를 함께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후련해하면서도 아쉬움이 짙고 행복해하면서도 남겨진 자들의 애틋한 눈빛을 이내 그리워하는 듯한 그이는 묵언 수행자처럼 집으로 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오롯이 퇴임식의 주인공이었던 그이, 그이를 보내는 80명이 넘는 선생님들과 행사에 대표로 참석했던 학생들, 그런 장면을 지켜보던 나와 우리 자녀들까지 모두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처럼 하나의 장면이 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퇴임식을 마치고 나서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 여럿에게 장문의 카톡이 날아들었다. 초임교사로 발령받아 방황하고 있던 순간에 등대가 되어 주었다는, 선생님을 본받아 아름다운 스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앞으로의 삶에도 박수를 보내겠다는 교사들, 선생님 말씀대로 학원에 다니지 않고 공부했더니 성적이 많이 올라 뜻을 이룰 수 있겠다는, 선생님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행운이었다는 학생들의 반응은 그동안 높은 자리의 제안을 마다하고 오직 평교사로 묵묵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그이에게 보석 같은 열매들이었다.


이어서 이미 근사한 사회인이 된 제자들의 환송식과 선물, 문자가 줄을 이었고 어떤 기수의 제자들은 나와 그이에게 커플 등산화를 선물하며 앞으로 열심히 운동하라는 말과 함께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반 학생들 모두가 우리 집 거실에 가득 모여 내가 싸준 김밥을 먹었다던 제자들이었다. 아! 이렇게 진실되고 따뜻한 순간, 감동적인 순간이 어디 있을까? 마치 그이의 제자들이 내 제자들인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저녁이 되어 아들과 며느리, 딸 사위와 함께 축하 파티를 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살아온 교단에서의 멋진 삶에 박수를 보내며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렇게 행복한 날이 또 어디 있을까? 뜨거운 사랑과 열정, 봉사정신으로 열과 성의를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후배 교사들 앞에서 나이를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솔선수범했던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게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비치니 더 뭉클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인 남편에게 나도 역시 힘찬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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