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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Aug 25. 2023

12. 여름에도 따뜻한 생강차를

여름 이야기

전주시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마음치유센터에서 독서치료 강의를 해줄 수 없냐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 없는 하루하루를 맞이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독서치료하면 나밖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며 추천했다던 도서관장님의 성의를 생각하니 쉽사리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곤란한 마음이 들어 그이한테 물어보니 당신은 이런 강의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아니냐며 부추겼다. 나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 힘들거든?”이라고 받아치며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강의를 수락했다. 강의가 시작되고 나서 아스팔트 도로가 쩔쩔 끓는 날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자며 마음을 다잡곤 다.


그러면서도 부탁받은 강의를 거절하지 말고 해 보라는 그이의 열열한 지원사격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더위에 지치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올레길 26코스를 걷자던, 포항에서 시작해서 통일전망대까지 걷자던, 시골에서 한달살이를 하자던 그이의 야심 찬 계획은 어찌 된다는 말인가? 당장 예약해 둔 9월의 여행은 취소하겠다는 말인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이에게 물었다. 강의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수락은 했는데 9월에 예약해 둔 여행은 어찌할 것이냐, 올레길 걷기와 한 달 살이도 혼자 할 것이냐고. 툴툴거리며 묻는 나에게 그이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9월 강의는 한 달 쉬면 될 것이고, 올레길이나 한달살이는 화요일 강의 마치고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월요일에 돌아와 강의 마치고 다시 떠나면 된다.”라고.    


그이의 결론은 참으로 명쾌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떤 일을 계획하고 결론을 내리는 부분에서 나는 계획한 일은 계획한 대로 가급적이면 실천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이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고 언제라도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계획을 변경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그이의 가을 계획은 이랬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국토순례대행진을 하는 젊은이들처럼 우리가 있던 곳을 훌쩍 떠나 처절하게 걷고 또 걷는 것, 하지만 그이의 계획은 이제 6일을 떠나 있다 내가 맡은 하루의 강의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고 또다시 6일을 떠나가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그이의 계획이 바뀌었다고 해도 섭섭하거나 화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인생지사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므로.


사실적이며 상세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그이와 달리 나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전체를 보는 성향이다. 또 냉정하고 원칙에 근거하여 결정하기를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이는 따뜻하고 감정에 근거하여 결정한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다르지만 사교적이지 않아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하지 않으며 조용하고 내적 세계를 좋아해서 집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점은 닮기도 했다.


그이와 나의 다름은 성격뿐이 아니다. 체질적으로도 그이는 추위를 많이 타고 나는 몸에 열이 많다. 그래서 그이는 여름에도 뜨거운 생강차를 좋아한다. 젊어서는 더위에 뜨거운 음식을 찾는 그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이를 위해 여름에 따뜻한 생강차를 끓여준다. 여름이니까 오랫동안 펄펄 끓이지 않고 간단히 만드는 따뜻한 생강차를 말이다.


그이에게 내가 대접하는 여름 생강차는 우선 생강 껍질을 벗겨 절구에 콩콩 찧는다. 포트에 끓인 물을 찧어놓은 생강에 부은 다음 거름망을 이용해서 생강찌꺼기를 걸러준다. 따끈한 생강물에 레몬즙과 꿀을 적당히 타서 그이에게 건네면 남편의 입이 귀에 걸린다. 무더운 한 여름에 그이에게 대접하는 따뜻한 생강차는 세월 속에서 영근 마음으로 끓여내는 생강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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