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로 유명한 전주에 살고 있다. 우리 집에서 한옥마을까지는 걸어서 30분, 버스로는 네 정거장, 자동차로는 7분이 걸린다. 며칠 전에 한옥마을로 걸어서 산책을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그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먼 타지에서 한옥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멋진 관광지에 가까이 살면서 왜 자주 오지 않았는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그이의 말을 듣고 나니 우리가 가까이에 있는 곳은 귀한 줄 모르고 멀리 있는 곳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가깝다는 장점을 십분 활용해서 이제부터라도 한옥마을에 자주 나오자고 했다. 만일에 이사를 가게 된다면 자주 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가까이 살 때 한옥마을을 열심히 애용하자고 했다. 그이와 이런 말을 주고받고 나니 마치 매일이라도 한옥마을을 나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한옥마을은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마을이다. 차분한 잿빛의 기와집이 층층이 늘어선 한옥마을은 전주시의 원도심으로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고택들이 많다. 오목대에서 경기전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현재의 경기전 뒷마당에 중앙국민학교가 있었다.(지금은 경기전 복원 사업으로 경기전 위쪽으로 이전했다)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등하교를 하던 경기전 길은 좁은 도로이지만 어려서는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금의 경기전길은카페, 식당, 기념품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되어있지만 내가 어렸을 땐 조용한 주택가였다. 경기전 담을 마주하고 있던 김소아과는 카페로 변했고전동성당 맞은편에 있던 서약국은 남창당 한약방이 들어서면서 2층에선 찻집이 운영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 가옥의 형태는 그대로이나 담을 허물고 벽을 터서 쓰임새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 기와집들은 추억을 훼방 놓는 개구쟁이들처럼 짓궂어 보이기도 한다.
연달아 3일 동안 그이와 함께 한옥마을에 다녀왔다. 그제는 전동성당과 경기전 주변을 돌다가 풍남문으로 내려와 전라감영을 지나 객사를 향해 걸었다. 전라감영 맞은편으로 경찰서가 있는데 전주시에서 경찰서 벽에 아파트 3층 정도의 높이로 전주의 옛지도를 그려놓았다. 옛날 모습을 재현해 놓은 그림 지도를 훑어보고 객사를 향해 걷다 보니 아스팔트 길이 흙길처럼 느껴지고 성문 안에 살던 온고을의 백성이 된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해 질 녘에 한옥마을 주차장 쪽에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타고 경기전으로 내려왔다.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여 있는 중심부를 관통하는 골목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걷기엔 어깨가 부딪혀 한 줄로 서서 걸어야 했다.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은 솟을대문 여러 개를 지나니 전동성당이 나왔다. 우리는 성당 외관을 오래 바라보고 왔다. 전동성당은 볼 때마다 한국에 산지가 오래 되어서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 색시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그이와 한옥마을로 나갔다. 조카와 식사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카의 근무처가 한옥마을 가까운 곳에 있기도 했지만, 한낮의 한옥마을을 걷고 싶어서 약속을 그곳으로 잡았다. 한옥마을을 사흘이나 연거푸 구경했으니 심드렁해질 법도 한데 걸을수록 또 걷고 싶고, 볼 수록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쩌면 옛 추억을 곱씹어 보고 싶은 나이 든 사람의 습성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한옥마을에 도착했다. 조카와 만나기로 한 종로회관은 전동성당이 멀찌감치 바라다 보이는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이 골목길은 내가 어려서 다니던 중앙국민학교 정문을 향해 뻗어 있던 길이었다. 그이와 나는 손바닥만 한 화강암 블록들이 수없이 바닥에 깔린 골목길 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다가 종로회관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종로회관은 옛날에 지우개, 연필, 색종이 등등 코흘리개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팔았던 문구점이 있던 자리였다.
종로회관에 예약해 둔 자리에 앉자마자 그이에게 어린 시절의 한옥마을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이가 자신의 고향 순창 들녘을 걸으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말해주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이의 지나간 추억의 장소를 더듬으며 친밀감을 느꼈듯이 그이도 마치 내가 자라난 한옥마을의 사람처럼 곳곳에 얽힌 추억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옛이야기들이 얽히고설키는 현재의 우리들 모습이다.
12시가 되자 조카가 종로회관으로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우리가 결혼할 때 유치원에 다니던 코흘리개 조카라 마흔 살이 넘었어도 우리 눈엔 그저 어린 조카로만 보였다. 키는 180센티가 넘고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큰데도 말이다. 오랜만이라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하던 조카가 자리에 앉으며 우리 둘을 향해 불쑥 한마디 내던졌다. "삼촌 왜 이렇게 흰머리가 많아졌대요? 숙모는 또 왜!"
삼촌 머리도 머리지만 서리가 내려앉은 내 머리를 보며 조카가 놀랜 모양이다. 나는 조카에게 "숙모가 아직은 흰머리 내놓고 다니기에 조금 이르다고?"라고 물었다. 조카는 "건강하게 지내시면 그만이죠 뭐"라며 나와 그이의 나이 듦을 아쉬워했다. 언제나 활기 넘치던 젊은 시절의 삼촌과 숙모로 기억하고 싶은 조카의 마음이 표정에서 묻어났다.
조카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한옥마을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듯이 머리 염색으로 젊음을 돌이킬 수 없으니 이제는 흰머리를 감추지 않고 살고 싶다. 내가 염색을 하지 않겠다고 두 달 전에 선포하자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흰머리 가득한 자신의 머리와 같은 색이 되니까 동질감이 느껴진다면서. 그래, 우리 부부는 이제 머리색깔도 닮은 흰머리 소년과 흰머리 소녀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