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가려고 부동산 중개소에 집을 내놓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좋은 기억이 많은 집이다.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함께 즐거워했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이 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해서 며느리와 사위까지 함께 모여 편안하고 여유롭게 쉴 수 있는 집이었다.
그이의 어머님과 할머님, 고모 고모부님, 외숙모님, 다섯 형제들과 조카들이 모였던 집이다. 나의 엄마와 큰어머님 외숙모님과 오빠 언니 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사랑채 같은 곳이었다. 거실엔 기다란 소나무 탁자가 놓여있어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면 카페 분위기가 난다. 53평의 아파트라 거실이 넓다 보니 성인 20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서 가족 모임을 하기도 수십 차례 했던 집이다. 어느 해엔 그이가 담임 맡았던 반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식사를 대접했던 집이다.
층수는 3층인데 창밖으로 우리 집 높이의 언덕 같은 화단이 쭉 이어져 있다. 봄이면 언덕 화단에 살구꽃과 감꽃,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여름에는 오래된 나무마다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데 아침이면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고 한 낮엔 매미소리, 밤엔 찌르레기와 귀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되면 감나무에 붉은 감이 대롱거리고 단풍잎이 화려하게 수를 놓는다. 겨울엔 가지마다 눈 쌓인 모습의 설경이 멋지다.
모임에 나가서 집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고 했더니 지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아쉬워했다. 전원주택의 느낌이 나고 조용하며 주차 걱정 없고 먼저 없는 좋은 집을 왜 팔려고 하느냐고. 집을 내놓은 데는 아이들의 의견이 한 몫했다. 잎으론 둘이서 살기에 집이 클 테니까 조금 줄여서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아이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그이가 퇴직하고 나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중개소에 집을 내놓은 지 한 달 만에 한 부부가 집을 보러 왔다. 순간 혹시나 집이 훌쩍 팔려버리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되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다행히 처음으로 집을 보러 온 사람은 구매하지 않겠다고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연락이 왔다. 거절당하는 소식 앞에서 남편과 나는 다행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무슨 심보인가. 집을 팔겠다고 내놓고서 팔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집엔 책이 많아서 책장이 여러 개다. 그릇도 많아서 그릇장도 여러 개, 옷이 많아서 옷장도 여러 개, 세라젬이며 안마의자며 승마기, 실내 자전거, 찜질기, 돌침대, 흙침대, 소나무 침대, 책상, 집에 있는 나무의자는 15개가 넘는다. 냉장고는 3대, 세탁기, 공기청정기, 에어컨, 제습기, 식기세척기, 주방용품들, 음식을 해 먹는 가전제품들과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은 또 어떠한가. 대체 이 많은 짐들을 어찌 이고지고 살았을까?
편리함을 위해 공간에 배치했던 물건들이, 유익하게 잘 사용했던 물건들이 언제부턴가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짐이 되었다. 이젠 짐이 된 물건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거나 재활용품 장에 내놓아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더 들어가면 내 손으로 짐 정리하는 것조차 힘들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이 짐을 줄이고 가벼워지기에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또 한 사람이 집을 보러 왔다. 첫 번째 집을 보러 온 사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딸과 함께 두 가족이 살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손주가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이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3년 전에 바깥 창틀 샷슈까지 다 바꾸었고 내부가 깨끗한 상태라 우리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면 도배장판도 갈지 않고 들어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피아노며 장식장과 책장, 거실 탁자까지 모두 놓고 가겠다고 했다. 우리의 제안을 좋아하던 그 사람은 집이 너무 맘에 드는데 가진 돈이 부족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집을 보려 왔던 사람은 돌아가면서 남편과 잘 의논해 보고 연락을 주겠노라고 했다. 집을 보고간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집이 팔려버리면 아쉬워서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든다. 과연 우리는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