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실제 1
소설가 김형수 작가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를 읽으며 문학 이론에 대해서 한 번쯤 정리해 보고 싶었다. 대학 시절 국어교육을 전공하며 접했던 문학 이론들은 이제 단어들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오랜 시간 먼지가 쌓인 책장을 넘기듯, 문학적인 글의 바탕이 되는 이론들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글이 자칫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혹시라도 읽는 도중 하품이 나오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가볍게 넘겨도 좋다. 글은 언제나 독자의 호흡에 맞춰 읽혀야 하니까.
문학 이론을 정리해 보겠다고 도서관에서 이론서를 뒤적일 때마다, 머릿속은 금세 복잡해졌다. 생각만큼 정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학 이론서들이 지나치게 구조화된 언어로 쓰여 있어, 문장을 따라가는 속도도 더뎠다. 누구 하나 들어줄 것 같지 않은 투정이었지만, ‘이걸 에세이처럼 자연스럽고 쉽게 풀어쓸 수는 없었을까?’ 하고 속으로 투덜대며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가까스로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대한 숲 같던 이론들이었지만, 줄이고 또 줄이며 정리하다 보니 조금은 간결한 말로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 글은 그 오랜 인내 끝에 건져 올린 문장들이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
문학원론(文學原論)
문학 원론은 문학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존재 이유에 대해 근원적으로 질문하는 학문이다. 문학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탐구한다. 비평가 김윤식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언어적 인식이며, 동시에 그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문학이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문학 원론은 시를 문학의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형식으로 간주한다. 단 몇 개의 단어로도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시의 힘은, 그 언어가 체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원론은 이러한 언어의 힘과 구조를 이론적으로 밝힘으로써, 우리가 왜 시를 읽고, 소설에 몰입하며, 극장에서 대사에 울컥하는지 설명해 준다. 결국 문학은(시는)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위안을 주는 영역이라고 간주한다.
(참고문헌-김윤식의『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동네, 1994. 테리 이글턴의『문학 이론입문』 경문사, 1997. 조남현의『문학이란 무엇인가』 열음사, 1983.)
시론(詩論)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사유를 응축하여 드러내는 예술이다. 시를 탐구하는 학문인 시론(詩論)은 단순히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철학적으로 탐색하고 사유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시론은 시의 본질과 형식, 주제와 기능 등을 논리적으로 고찰하며, 시가 인간의 내면과 삶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시는 언어를 넘어서 삶의 이면에 닿는 예술이며, 시론은 그 언어의 결을 따라 시의 심층을 파고든다.
시론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도 풍부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오늘날에는 SNS나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시가 빠르게 소비되면서, 그 본질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시는 여전히 인간의 말할 수 없는 내면을 건드리는 예술로 존재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론은 늘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귀 기울인다.
시론은 시에 사용된 언어의 미묘한 결을 읽고, 무엇이 시를 시답게 만드는지 고민한다. 운율과 이미지, 상징과 함축이 정교하게 얽혀 있는 시의 세계는 단순히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다가가기 어렵다. 시를 읽는 데는 깊이 있는 이해와 비평적 시선이 요구된다.
(참고문헌-신형기의『시의 언어와 구조』 문학과 지성사, 1999. 김수영의 『시와 시학』민음사, 1993.)
소설론(小說論)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진실’에 접근하는 장르다. 그래서 소설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자, 우리가 차마 말하지 못한 내면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언어의 집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살아 숨 쉬듯 말하고, 사건은 그들의 욕망과 갈등 속에서 흘러간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잠시 입어보는 일’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공감하고, 때로는 반성하게 된다.
E. M. 포스터(E. M. Forster)는 『소설의 이해(Aspects of the Novel)』에서 “소설은 시간 속에서 인간을 다루는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소설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예술이다.
박경리는 『토지』에서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땅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인간과 땅, 역사와 기억 사이의 깊고 긴밀한 관계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이처럼 소설은 한 사회의 시대정신을 반영함과 동시에, 개인의 내면세계를 정밀하게 비춘다.
(참고문헌- E. M. 포스터, 이성호 옮김, 『소설의 이해』, 문예출판사, 1990 /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문학과 지성사, 2010 / 송명희, 『한국현대소설의 이론과 분석』, 푸른 사상사, 2006)
운율론(韻律論)
언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음악적 요소들에 대한 이론이 바로 운율론이다.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리듬, 소리의 반복, 운(韻)의 흐름은 단어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감정을 자극하고, 정서를 조율하는 힘을 지닌다. 고대부터 시인은 언어에 질서를 부여하며, 그 질서 안에 마음의 떨림을 담아내고자 했다.
시인 고은은 『시는 인간이다』에서 “시는 내면의 음악이다. 운율이 없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운율은 시의 정체성이자 감상의 토대가 된다. 좋은 시는 자연스럽고 절제된 리듬을 품고 있으며, 그 리듬은 독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운율은 단지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사유의 파동이며 정서의 흐름이다.
박목월의 「나그네」에서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구절에는 부드러운 소리의 조화가 공간과 시간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윤동주의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은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깊은 울림을 안겨 준다. 이 울림은 반복과 리듬을 통해 독자의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운율은 시를 음악으로 만들고, 언어를 예술로 이끈다. 그러므로 운율론은 단순한 기교의 분석이 아니라, 시가 지닌 생명의 리듬을 이해하기 위한 내면의 탐구다. 그것은 시가 어떻게 언어의 한계를 넘어 감정과 의미의 세계로 나가는지 설명해 주는 이론이다.
(참고문헌: 이제훈, 『시론과 운율: 한국 시에서의 리듬 텍스트』, 문학과 지성사, 2014 / 김영민, 『시의 운율과 음악성』, 문예출판사, 2011 / 정호승, 『운율론: 시의 리듬과 구조』, 창비, 2010)
문체론(文體論)
글을 구성하는 ‘말의 습관’에 대해, 작가가 사용한 언어의 결과와 사유의 흔적을 탐구하는 이론이 문체론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작가마다 작품마다 고유한 울림이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루어도 누군가의 문장은 고요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침없이 흐른다. 이 차이가 바로 문체에서 비롯된다. 학자이자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문학과 의식』에서 “문체는 글쓴이의 사상과 생활이 녹아든 형식이자, 그 자체로 세계를 드러내는 창이다”라고 말했다. 문체는 단순한 말솜씨가 아니라 사유의 방식과 감정의 결을 반영한다는 뜻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문장은 일상적이면서도 섬세한 심리가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여성성과 경험이 결합된 서사적 문체로, 간결하면서도 촘촘한 문장 속에 성장과 상실을 담아낸다. 소설가 황석영은 역사와 삶을 소설로 기록하는 작가로, 그의 문체는 서사적 깊이와 현실의 질감을 생생히 품고 있다. 『오래된 정원』은 역사와 삶의 모서리에서 피어나는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소설가 한강은 함축적인 언어와 간결한 묘사, 정적인 문체로 고통과 침묵의 세계를 그린다. 『채식주의자』는 반복과 여백의 문체를 통해 인간 내면의 균열을 도드라지게 했다.
이처럼 문체의 차이는 독자가 느끼는 글의 분위기와 감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글은 단순히 생각을 옮기는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존재 방식이 드러나는 언어의 옷이다. 따라서 문체란 ‘무엇을 말할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문체론은 이러한 고민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현미경과 같아서, 글의 형식을 넘어 그것이 어떤 삶과 생각에서 비롯되었는지 밝혀 준다.
(참고문헌: 백낙청, 『문학과 의식』, 문학과 지성사, 1993 / 이재훈, 『한국 현대문학의 문체 연구』, 문학동네, 2015 / 김현, 『문체론: 글쓰기의 예술과 철학』, 교유서가, 2010)
순수이론(純粹理論)
순수이론은 문학을 그 자체로 바라보려는 따뜻한 시선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목적이나 도덕적 교훈에서 한걸음 물러나, 문학 속에 흐르는 언어의 아름다움과 형식의 조화, 그리고 감정의 섬세한 떨림에 마음을 기울인다. 문학을 자율적인 예술로 이해하며, 외부의 평가보다 텍스트가 스스로 완성해 내는 내적 세계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독자는 글 속에서 감각과 이성이 어우러져 춤추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상(李箱)의 시에 있다. 그의 「오감도」 속 “제1의 이해가 무서워서 도망쳤소 / 제2의 이해도 무서워서 도망쳤소”라는 구절은 낯설고 난해하지만, 오히려 그 낯섦 속에서 독특한 울림과 감흥이 피어난다.
순수이론은 이렇게 문학이 본연의 예술성으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문학이 가장 깊은 곳에서 스스로 빛을 내며, 언어의 미묘한 숨결과 울림을 되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문학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연현, 『순수문학론』, 태학사, 2005 / 김성곤, 『이상의 시 연구: 오감도를 중심으로』, 지식산업사, 2012)
비평(批評)
문학이 창작의 예술이라면, 비평은 해석의 예술이다. 문학비평은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와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과정이다. 작가가 남긴 말과 침묵 사이에서, 숨겨진 감정을 찾아내고, 보이지 않는 의미를 밝혀낸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의 감상이 아닌, 문학의 깊은 본질을 탐험한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를 넘어, 독자의 해석으로 다시 태어난다”라고 했다. 이 말은 비평이 단순한 독서 행위를 넘어, 새로운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가는 창조의 작업임을 일깨워 준다. 비평은 문학이라는 옷을 조심스레 벗겨, 그 안에 숨 쉬는 사유와 감정의 맥박을 느끼는 일이다.
비평은 작가의 문장이 탄생한 뒤, 그 문장을 이어가는 또 다른 이야기다. 그렇기에 비평가는 문장들 앞에서 누구보다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해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정직한 마음과 깊은 귀 기울임으로 작품을 다시 빛나게 해야 한다. 나아가 독자의 마음에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참고문헌: 김상헌, 『문학비평의 이해』, 문학과 지성사, 2001 / 김영진, 『롤랑 바르트, 텍스트와 독자』, 소명출판, 2010 / 김준성, 『문학비평론』, 창비, 2015)
학자들이 써놓은 문학 이론을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정리해 봤다. 가능한 한 딱딱하게 구조화된 언어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말투로 풀어내려 애썼다. 결론적으로, 문학 이론을 아는 것은 글 쓰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표현의 가능성을 넓혀 주고, 글 쓰는 이가 감각과 기술을 이성적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문학 이론은 창작의 감각을 더욱 뾰족하게 갈고닦아 주는 지적인 도구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일수록, 문학 이론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 이론을 통해 글쓰기는 더 깊고 풍성해지며, 마음과 생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