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본기 다지기 6
어느 날, 책 속의 문장 하나에 발이 얼어붙듯 멈춘 적 있다. “가난은 참 성가신 것이었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난이 습관이 되면 비굴해진다는 것을 나는 그때 몰랐다.” 박완서의 소설에 나오는 이 문장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단순한 문장인데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마 그 안에 담긴 정직함과 절제된 감정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좋은 문장이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은 버스 안에서 퇴근길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모두가 무표정하게 스마트폰을 보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디오북에서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문장과 문장을 한참 지나 내 마음을 꼭 찌르던 그 문장이 들리던 순간, 마치 낡은 커튼 사이로 빛 한 줄기가 스며들 듯 마음이 환해졌다. 갑자기, 내 삶의 장면들이 조용히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날 밤, 노트북 앞에 앉아 오래 전에 써놓았던 글을 다시 읽었다. 문장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으며, 어느 문장에서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어느 문장에서는 홀가분해졌다. 좋은 문장이란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것임을, 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문장’을 꿈꾼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마음에 남는 표현을 필사하고, 문장 노트를 채워가며, 좋은 문장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누군가에겐 수사와 비유가 풍부한 문장이, 또 누군가에겐 간결하고 정직한 문장이 마음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문장에는 분명 공통된 비밀이 숨어 있다.
좋은 문장은 첫째, 감정을 담되 넘치지 않는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문장은 쉽게 피로해진다. 오히려 감정이 절제된 언어로 표현될 때,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김소월의 “가는 길에 그 꽃을 보듯이 나는 너를 본다”라는 표현은 사랑의 감정을 소란스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절제된 감정의 표현, 그것이 좋은 문장의 첫 번째 힘이다.
둘째, 일상 속 언어에 진실이 배어 있어야 한다. 법정 스님의 말처럼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문장은 특별한 단어 없이도 인생의 깊이를 전한다. 버리는 생활로 자유롭게 사셨던 스님의 삶이 문장에 담겨있다. 이렇게 평범한 말속에 담긴 깊은 생각은 수려한 문장보다 오래 남는다.
셋째, 이미지와 상징을 가진 문장은 장면처럼 남는다. 『소나기』 속 소년이 소녀의 죽음을 듣고 괜히 냇물을 건너는 장면은 긴 설명 없어도 상실의 감정을 충분히 전한다. ‘괜히’라는 부사 하나가 그 모든 감정을 품고 있다. 좋은 문장은 보여주되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넷째, 문장에는 리듬이 있어야 한다. 반복과 호흡을 갖춘 문장은 시처럼 가슴에 닿는다. “내가 슬플 때 누가 나를 위로하지?/꽃 한 송이, 별 하나가 나를 위로하지”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는 단순하지만 일정한 호흡과 반복이 있고, 그 안에 조용한 울림이 있다. 소리 내어 읽을수록 더 깊이 공감된다.
다섯째, 고유한 시선이 담긴 문장은 독창성을 가진다. 김수영 시인의 “자유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향한 자유다”라는 문장은 단순하지만, 익숙한 개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문장은 짧아도 오래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좋은 문장의 중심에는 ‘진실함’이 있다. 박완서의 “나는 불행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불행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라는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깊은 울림이 있었다. 삶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도 쓰는 이유를 찾아내는 시선은 문장을 진실하게 만든다.
좋은 문장은 감정을 절제된 언어로 담아내고, 일상의 말에 철학을 실으며, 이미지와 리듬을 통해 감정을 건드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진심이 깃든 문장이다. 글은 생각의 외피이자 감정의 운반선이다. 그러니 결국 좋은 문장이란, 정직하게 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좋은 문장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작은 결국 독서에 있다. 나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마음에 깊이 들어온 소설이나 에세이, 시집을 만나면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해 읽곤 한다. 그렇게 읽는 책의 구조와 문장 배열, 문체와 단어의 숨결까지 세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되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백 번 읽는 것이, 더 깊은 깨달음과 유익함을 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도움 될 만한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나와 같은 방식의 독서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문장을 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책과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