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실제 2
세 번째 책 『춘심이 언니』는 POD 출판(Print On Demand, 주문형 출판)으로 출간한 시집이다. 자가 출판을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주변에서 '시집은 가장 안 팔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팔리지 않을 책의 원고를 어느 출판사에서 선뜻 받아줄까. 게다가 내가 쓴 시들이 어설프다고 생각했다. 짧막하게 쓴 글을 시라고 우기며 한 편, 두 편 써오던 글을 한 권으로 묶고 싶었다. 그래서 편집부터 표지 디자인, 인쇄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감당하는 자가 출판 방식을 선택했다. (POD 출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양한 출판 방법'에서 다루겠다.)
춘심이 언니는 나보다 열 살 더 많았다. 어린 시절, 방학이 되면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 고모 딸 춘심이 언니를 만났다. 나이 들면 열 살 차이도 흐려지지만 어릴 땐 열 살 차이가 무척 크게 느껴진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언니는 이미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가슴이 봉긋하고 허리는 잘록했으며 볼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언니는 건넛마을에 사는 춘식이 오빠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언니와 병실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온몸이 마비된 언니는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장례식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언니의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언니의 죽음을 통해 몸 돌볼 겨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두 손 움켜쥐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니가 살던 집 대문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
하얀 종이에 쓴 먹글씨가
봄바람에 펄럭거렸네
-『춘심이 언니』, BOOKK, 2024.
형부가 대문에 붙여놓았던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은 내게 쓰디쓴 감정을 얹혀주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에, 큰 복이 깃들고 기쁜 일 가득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 하지만 그 글귀는 생이별 앞에서 아이러니가 되고 말았다. 봄바람에 입춘첩이 마치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때의 감정을 토대로 언니의 일생을 담은 서사시 13편을 썼다. 그 시들을 다른 시와 함께 『춘심이 언니』라는 제목의 시집에 실었다. 시집을 내고 나니 언니의 삶에 작은 집 한 채 지어준 듯 위로가 되었다. 하늘에서 언니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는 순간의 감정을 붙잡는 예술이다. 순간의 감정을 붙잡아 기록하다보면 사람들 마음속에 오래 머문다. 결국 시는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묶이고, 엮여, 책이 된다.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시 읽고
한 번 읽어도 느낄 수 있는
쉬운 시 쓰고 싶었다.
싱거워서 밍밍한 시 만나고
소금 간 맞추듯
맛있는 시 쓰고 싶었다
세련되지 않아도 수수한 시
거칠어도 알맹이 있는 시
투박해도 울림 있는 시 쓰고 싶다
心象이 마음에 머무는 한
거울처럼 정직하고
유리처럼 맑은 시 쓰고 싶다
『춘심이 언니』라는 시집의 여는 시로 ‘내가 쓰고 싶은 시’를 실었다. 난해한 시를 읽고 나서, 밋밋한 시를 만나고 나서 든 생각을 담았다. 내가 감동받았던 시들은 어렵지 않았다. 쉽게 이해되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요즘 시는 형식과 주제, 언어의 태도 면에서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상징과 은유를 중시하고, 고상한 언어로 세계를 해석했다면, 이제는 일상어로 감정을 드러낸다. 시인은 언어의 담을 낮추어 독자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
시인 정현우는 대화하듯 시를 쓴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 나는 괜찮아
… 왜냐하면 / 나도 나를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거든”
- 정현우, 『가만히 부서지는』-
이런 시는 ‘문학’이라는 벽을 허물고, 독자와 심리적 거리를 좁힌다. SNS 시대인 지금은 짧고 강렬한 문장이 주목받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이 시가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강렬한 문장이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무게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시는 산문과 시의 경계도 허물고 있다. 시집이 산문 같고, 산문이 시 같아졌다.
책이 되는 시는 단순히 잘 쓴 한 편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도 다시 펼쳐보게 되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을 엮은 시집은 누군가에겐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를 위로하며,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다가 삶을 움직인다.
시의 마음은 시인에게만 있는 것 아니다. 누구라도 한 줄기 바람, 꽃 한 송이, 사소한 사물, 계절의 변화 등등 눈앞에 있는 평범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힘이 있다면 시를 쓸 수 있다. 한 편 시에서 출발해서 시 쓰는 일이 이어진다면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