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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되는 소설 쓰기

글쓰기 실제 3

by 김경희

문장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온다. 대단한 순간도 아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를 듣다가, 오래전 친구의 웃음소리가 불현듯 떠오를 때, 그저 스쳐 가는 장면 하나, 가슴을 건드린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돈다. 이럴 때 나도 모르게 펜을 든다. 하지만 그 문장이 바로 책이 되는 일은 없다.


한 사람의 마음에서 태어난 생각이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과 인내, 그리고 수많은 결정이 필요하다. 책이 되는 소설은 단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치열하게 골라낸 단어와 끝까지 붙잡은 감정이 만들어낸 구조물이다. 단단하면서도 투명한 마음 조형물이다.


단편소설 몇 편을 써 두었다. 완성하지 못한 장편 소설도 있다. 쓰고 싶은 주제의 소설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가끔 불쑥불쑥 노크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성향이라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 신이 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물꼬 터진 논두렁 같다. 하지만 전업 소설가가 아니니, 소설을 쓴답시고 흉내만 내는 수준이다.


연말이 되면 각종 신문사에서 신춘문예 작품 공모전을 연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춘문예에 보란 듯이 당선되는 꿈 한 번쯤 꿔봤을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춘문예 공모전은 높은 벽이지만 찬 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계절이 오면 감상적인 마음에 이끌려 써놓은 소설을 꺼내 들고 여러 신문사를 기웃거린다. ‘나도 문학하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면 좋겠지만, 당선되지 않아도 좋은 점이 있다. 응모하느라 쓴 소설이 차곡차곡 쌓인다는 점이다. 언젠가 여러 편의 이야기를 엮은 단편 소설집이 내 이름을 걸고 책으로 나올지 모른다. 꿈으로만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소설을 쓸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질문 던지기다. ‘왜 이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질문에 대한 답이, 소의적(小義的)이든 대의적(大義的)이든, 나를 설득할 때 비로소 소설 첫 문장을 시작한다. 아무리 흥미로운 소재라도 ‘왜 이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다면 나 자신의 가슴도 동요되지 않는다.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말했다. “이야기는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지만, 결국 돌아오는 곳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이다.”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소설은 결국 내 안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마음에 가서 닿는 일이다. 이야기를 쓰며 나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을 때, 이야기는 생명력을 가진다. 그럴 때만 소설은 책이 된다.


소설을 구성하는 중심 뼈대는 ‘인물’이다. 사람 하나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 그 사람의 내면을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 중요하다. 소설은 결국 인물이 내리는 선택들의 총합이다. 인물에게 욕망이 없으면, 사건은 가라앉고 이야기는 떠다닌다. 작가가 인물을 얼마나 섬세하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독자는 그 인물과 함께 웃고 울게 된다. 나는 가끔 소설가의 눈으로 주변 사람을 관찰할 때가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 세상을 떠난 사람이든. 그들을 소설 속 인물로 극진하게 모셔오기 위해 그들의 삶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으로 사는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의 대리인이 아니다. 그들은 독립된 생명이다. 작가가 그들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볼 때 이야기는 숨을 쉰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을 대하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한강의 문장 앞에서 오래 멈추는 이유. 그것은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하나가 더 있다. 이야기를 포근하게 덮어주는 ‘묘사’다. 풍경 하나, 대사 한 줄, 표정 하나에도 세계는 바뀐다. “그는 물을 마셨다.”라는 말과 “반쯤 녹은 얼음이 떠 있는 유리컵을 들고, 물보다 차가운 기억을 한 모금 삼켰다.”라는 문장은 전혀 다른 울림을 준다. 독자는 설명보다 감각에 먼저 반응한다. 하지만 묘사는 과하지 않아야 한다. 살아 있어야 한다. 냄새가 나고, 소리가 들리고, 손끝이 간질거려야 한다. 한 장면이 또렷이 떠오를 때, 독자는 이야기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다.

이야기 중심을 잃지 않는 질문. 자기 마음을 닮은 인물. 감각을 일으키는 디테일.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질 때 소설은 책이 된다. 책이 된다는 건, 내 안의 조각이 누군가의 삶 안에 놓인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책상 위, 침대 머리맡, 비 오는 오후의 카페 구석 어딘가에.





이외에도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꼭 붙들어야 할 네 가지 기둥이 있다. 시간 배경, 공간 배경, 줄거리, 시점. 이야기는 이 네 갈래의 숨결 위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시간은 문장의 공기다. 어떤 계절, 어떤 시간대에 이야기를 두느냐에 따라 독자의 마음에 스며드는 온도가 달라진다. 같은 사건이라도 겨울밤에 들려주면 고요한 외로움이 배어 나오고, 여름 한낮에 놓이면 뜨겁고 들뜬 기운이 흐른다.


공간은 이야기를 감싸는 살결이다. 좁은 골목의 눅눅한 그림자, 도시의 불빛, 바닷가의 짭짤한 바람은 인물의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공간이 살아 있을 때, 독자는 그 자리에 발을 내딛는 듯 이야기에 깊이 들어선다.


줄거리는 이야기의 심장이다. 인물이 겪는 갈등과 상처, 그 안에서 맞이하는 변화가 곧 이야기의 박동이다.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맥박을 따라 흐르게 할 때 이야기는 힘을 얻는다.


시점은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1인칭은 좁지만 깊어, 한 사람의 떨리는 마음을 그대로 전해 준다. 3인칭은 넓고 투명해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 주지만, 그만큼 거리감이 생기기도 한다. 어떤 창을 열어 줄 것인지는 작가의 선택이며, 그 선택이 곧 독자의 체험을 결정한다.


시간과 공간, 줄거리와 시점. 이 네 가지는 단순한 기술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뿌리이자 날개다. 당신이 쓰려는 글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어디로 날아오를지, 이 네 갈래의 기둥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책 몇 권 소개해 본다. 대학에서 진행한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발상 → 인물 만들기 → 장면 구성 → 서사 구조까지 소설의 기본기를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는 최옥정의 『소설창작 수업』, 소설가이자 글쓰기 강사가 문장 쓰기 → 장면 구성 → 인물 만들기를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는 온유의 『소설가의 글쓰기 수업』, 작가가 실제로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 경험 중심으로 자유롭고 감각적인 창작법을 소개하고 있는 정세랑 외 9인이 쓴 『지금, 소설을 쓰는 일』, 상상력, 개연성, 서사 구조를 딱딱한 이론보다 놀이처럼 쓰도록 안내하고 있는 김종혁의 『작가의 탄생』, 줄거리 짜는 법, 인물 만드는 법, 첫 문장 쓰는 팁까지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어 초보자도 쉽게 따라 쓸 수 있는 도나 레빈의 『소설 쓰기의 모든 것』이다. 이 책들은 내가 소설 쓸 때 실제로 도움받은 책들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자, 두려운 일이다. 내 마음의 가장 부드러운 면이 종이에 눌려 누군가에게 읽히는 일. 그래서 소설은 진심으로 써야 한다. 겉만 번드르르한 이야기는 얼마 못 가서 잊히고 만다. 작가가 스스로를 속이면 독자는 금세 눈치챈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아이러니하게 허구적이다. 박완서는 “소설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소설은 허구의 탈을 쓰고 진실을 건네는 예술이다. 작가가 쓴 거짓말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외로움을 나누며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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