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 고향 전주이야기
‘바람 쐬는 길’은 전주천을 따라 흐른다. 지리적으로 산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서쪽과 북쪽의 낮은 구릉과 산맥에서 시원한 바람이 내려온다. 여름철에는 상관 쪽에서 내려오는 산지성 바람 때문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산바람이 느껴진다.
전주천 상류 쪽 절벽 위로 한벽당이 아련한 한 폭의 그림처럼 올려져 있다. 누각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하늘을 향해 살짝 들려 있고,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맑게 흐르는 전주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벽당은 단순한 누각이 아니라 조선 개국공신 월당 최담이 세운 별장이다. 후대로 이어지며 전주 선비들의 풍류와 사색의 공간으로 자리한 역사적 명소다.
'한벽’이라는 이름은 절벽 아래 물빛이 벽처럼 푸르게 비치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옛 시인들과 묵객들이 이곳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누각의 들창 사이로 사락사락 스치는 바람 소리가 마치 옛 선비들이 읊던 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벽 위에는 강암 송성용과 농천 이병희의 편액이 걸려 있어, 그들이 남긴 숨결이 여전히 한벽당을 감싸는 듯하다.
계절마다 한벽당은 전주 사람들의 일상을 품어준다.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모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데, 먼저 도착한 이들이 그날의 주인이 된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 올랐다. 오래 함께한 바느질 모임에서는 마루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바느질하며 수다를 떨었고, 독서 모임의 회원들과는 책을 펼쳐두고 전주천의 흐름을 배경 삼아 한나절을 보냈다. 언니와 동생이 모여 올라가던 날이면, 한벽당의 오래된 마루 위에서 전주천을 내려다보며 어린 시절의 시간을 되살려냈다. 묻어둔 기억들이 바람을 타고 하나둘 깨어나는 곳, 이런 힘이 한벽당에 있다.
한여름 어느 토요일, 오모가리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한벽루로 오르던 길이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피리 소리가 들려와, 그 소리를 따라 누각에 올랐다. 모시 적삼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전주천을 바라보며 대금을 불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마루에 앉자 과거와 현재가 살포시 포개지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자 남편과 함께 조용히 박수를 쳤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토요일마다 이곳에 올라 대금을 분다는 치과의사였다. 예를 중히 여기고 바람과 어울려 노는 전주 사람 특유의 기질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한벽당에서 내려와 나지막한 굴을 지나면 오모가리탕 파는 집들이 줄지어 있다. 한벽집, 화순집, 남양집. 모두 전주천과 더불어 세월을 견뎌온 곳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집들은 맑은 전주천에서 직접 잡은 민물고기로 탕을 끓여 팔았다. 그때의 전주천은 물이 맑았고 민물고기가 많았다.
36년 전,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유난히 심했던 입덧도 오모가리탕 속 시래기를 먹으면 금세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한벽집은 내게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숨결과 함께 남아 있는 고향의 맛이다. 2대째 이어온 이 집은 민물고기 본연의 풍미를 정성껏 지켜내고 있다. 특별한 육수도 없이, 과한 양념도 없이, 재료가 가진 맛을 은은하게 끌어올린다. 빠가사리탕 한 그릇에 밥을 비우면 마지막에 나오는 누룽지는 가마솥 향이 고소하게 퍼져 마음까지 데워준다.
남양집은 또 다른 방식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고 쌀뜨물과 여러 양념을 조합해 깔끔하면서도 깊은 육수 맛이 일품이다. 반찬은 다채롭고 시골에서 직접 기른 채소가 어우러져 건강한 맛을 자랑한다. 오모가리탕 한 그릇이 단순한 식사가 아닌, 정성으로 차린 한 끼 같다. 화순집은 한 상 가득한 풍성함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반찬이 그릇마다 담겨 나오고, 마지막 누룽지까지 정성스러운 한 끼가 마음을 포옥 덮어준다.
세 집의 오모가리탕은 모두 다르게 전통을 이어오고 있지만, 그릇을 비우고 나면 결국 같은 여운이 남는다. 전주천의 바람, 한벽당의 고즈넉함, 그리고 이 고장의 오랜 손맛을 느낄 수 있다. 한벽집에서 전통의 깊이를 느끼든, 화순집에서 푸짐한 정을 맛보든, 남양집에서 건강한 맛을 누리든,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전주천과 한벽당의 고즈넉한 바람이 식사의 마무리를 따뜻하게 감싸줄 것이다.